나는 가경(嘉慶) 시절에 태어나 도광(道光) 시절에 늙었으므로 더불어 노닌 친구들이나 뒤좇아 다닌 어른들이 오로지 가경 도광 시절 사람뿐입니다. 가경 도광 시절이라도 일만 리 밖에서 태어났거나 오랑캐 지역의 들판에 사는 사람이라면, 둘 사이에 서로 오가는 소식이 없어 목소리고 얼굴이고 접하지 못합니다. 마치 먼 훗날 사람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과 같지요. 둘 사이에 소식이 오간다고 합시다. 서로 만나보지 못한다면, 역사책 속에서 옛사람의 이름을 보는 것과 다를 것이 있을까요?
나는 어리석고 촌스러워 남들이 저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대가 나를 잘 알지 못할 것이므로, 먼 훗날의 사람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듯이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이 옳습니다. 반면에 그대는 일찍부터 학교에서 공부하고 진사시험에 급제하였습니다. 그대의 이름을 나는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면, 내가 그대를 보는 것이 역사책 속에서 옛사람의 이름을 보는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갑작스레 그대를 만났으니 이것은 먼 옛날 사람과 먼 훗날 사람이 오늘 이 순간에 만난 셈입니다. 이야말로 하늘과 땅 사이의 기묘한 인연이 아닐는지요?
그렇다고는 하나, 먼 옛날 제왕이 백성들을 네 부류로 구별한 뒤로 선비는 농사꾼과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았고, 상인은 공인(工人)을 찾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선비 부류에 속한다 할지라도 노장(老莊)을 추구하는 자는 불교를 숭상하는 자와는 가는 길을 달리 했고, 양자(楊子)를 믿는 자는 묵자(墨子)를 믿는 자와는 지향점이 달랐습니다. 예로부터 뜻을 함께 하고 도(道)가 합치되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백성들에게는 네 등급의 구별이 있고, 선비에게는 네 가지 편당(偏黨)이 있습니다. 다른 부류의 사람과는 앉는 자리를 구별한 다음에야 앉고, 말을 조심스럽게 고르고 나서야 이야기를 꺼내지요. 눈을 치켜뜨고 상대를 노려보거나 멈칫멈칫 조심해야 할 만큼 창과 방패가 으스스하게 벌여 있는 꼴입니다. 아! 오늘날의 벗을 사귀는 도리가 또 어쩌면 그리도 차별이 심할까요?
그러나 나와 그대는 앞서 말한 여러 가지 걱정이 없어서 늘 속마음을 드러내고, 반가워하는 눈길을 주고받지요. 따라서 속 시원하게 마음을 털어놔서 숨기는 사연이 조금도 없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고개를 수그린 그대의 모습에서는 멍하니 무언가 상실한 느낌이 들고, 고개를 치켜든 그대의 모습에서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고민하는 느낌이 듭니다. 속이 뒤틀리고 불평이 쌓인 듯하며, 원망하고 슬퍼하는 듯합니다. 비록 슬픔을 말하지는 않지만 절절한 슬픔을 가슴 안에 담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그것이 대체 무엇일까요?
대저 사람이 태어나면, 활과 화살을 걸어놓고 시와 글을 가르칩니다. 천지사방에 뜻을 두게 하고 만물을 통섭하기 위해서지요. 이 우주 사이에 벌어지는 일 가운데 우리 분수 안의 일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마는, 덕을 세우는 것과 입언(立言)하는 것은 궁지에 몰린 군자가 할 일이요, 천하를 두루 선(善)하게 만드는 것은 일이 잘 풀리는 군자가 할 일입니다. 나와 그대는 궁지에 몰린 자와 일이 잘 풀리는 자 가운데 어디에 속할까요?
선비로서 불우하게 지낸 자가 고금에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것도 아니고, 학문이 올바르지 않은 것도 아니며, 처한 시대가 태평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고받는 대화의 끝에 이르면 어쩔 도리 없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리고 맙니다.
그러나 맹자는 “하늘의 때는 땅이 주는 이익만 못하고, 땅이 주는 이익은 사람 사이의 화합만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람 사이의 화합이 극에 달하면 하늘과 땅도 뒤로 물러나 들을 수밖에 없지요. 이것이 어찌 생명의 본성이며 하늘에서 정해놓은 것이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현기(玄錡)와 정수동(鄭壽銅)은 저자거리에서 미쳐 노래 부르거나 날마다 술을 퍼 마시며, 이몽관(李夢觀)과 유산초(柳山樵)는 신병을 핑계로 문을 걸어 닫고 나오지 않은 채, 머리에 망건을 쓰지 않은 지 벌써 십 년째입니다. 이 몇 분들 중에서 어떤 분은 울울답답하여 펄쩍펄쩍 뛰면서 불평한 기운을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자취를 숨기고 재능을 감춰서 자신들의 성명을 드러내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 행위가 어찌 그분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한 것일까요? 부득이하여 그렇게 행동하는 것임을 자주 목격하였습니다.
이제 그대가 또 영예로운 길을 헌신짝처럼 벗어던지고 영춘(永春, 충북 단양) 산골짜기로 완전히 들어갑니다. 아아! 그대의 뜻을 잘 알 만합니다! 나는 재주가 없기는 하나 위의 여러 분들이 지닌 병통을 지닌 데다가 의지는 한결 큽니다. 현기와 정수동의 행동을 하려 하지만 신병이 있어 하지 못하고, 이몽관과 유산초의 행동을 흉내내려 하지만 남들이 말을 많이 할까봐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그대가 가는 길을 따라가자니 형편상 편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답답하게 그대를 마주보고 있으려니 바보가 된 듯 미치광이가 된 듯 서성대고 안절부절 못합니다. 누가 그렇게 시키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아아! 슬픕니다! 태화산(太華山)의 묏부리가 푸르러서인가요? 금수(錦水)의 물결이 맑아서인가요? 제 한 몸 착하게 살다가 세상을 버리고 영영 등지니 지팡이 잡은 어른¹과 같은 은사라고 해야 할까요? 아침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독서하니 동소남(董邵南)² 같은 가난뱅이라고 할까요? 벼슬길로 가는 지름길에 서있는 종남산(終南山) 사람이라고³ 해야 할까요? 아니면 막다른 길에 이르러 수레를 돌이키는 완보병(阮步兵)⁴이라고 해야 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