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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고전의 향기032 조선에는 선비가 없다

by 혜당이민지 2008. 11. 6.

고전의 향기032        

조선에는 선비가 없다

유림전(儒林傳)에 넣을 서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저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책 사이에 이름을 끼워 넣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니 감히 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물정에 어둡고 앞뒤 꽉 막힌 제 소견으로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이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나라가 4백년 동안 문화를 통해 나라를 융성하게 다스리고 인재를 왕성하게 배출하였으므로 찬란하게 기록할 거리가 없지 않습니다마는, 유독 선비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일까요?

자기 세계를 튼튼하게 구축한 사람을 선비라 하고, 문화적 역량이 큰 사람을 선비라 하고, 도(道)로써 민심을 얻은 자를 선비라 하고, 고금을 잘 구별하는 사람을 선비라 하고,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에 두루 통달한 사람을 선비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주죽타(朱竹타)¹ 선생이 말한 선비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두루 헤아려 볼 때, 성취한 수준이 만에 하나라도 저 기준의 근사치에 접근한 선비가 있을까요?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른바 선비라고 부르는 존재를 얼추 알만 합니다. 완고할 정도로 말에는 신의가 있고 행동을 꼭 실천하는 사람²과 부지런히 책 구절을 파고드는 데 열중하는 사람이지요. 그들이 따지고 다투는 것은 주자(朱子)가 초년과 만년에 주장한 것이 다르니 같니 하는 것이고, 그들이 저술한 서책은 잡복(雜服)과 절하는 예법에서 어느 것이 앞서고 뒤서느냐 하는 것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게다가 먼저 배운 것을 주장으로 삼아 다른 많은 사람을 궁벽한 시골뜨기로 배척해 버립니다. 분분한 학설이 너무 많다 보니 달리 주장하는 자를 개인적 원수로 여기고, 남의 결점을 지나치게 모질게 비판하며 너무 심하게 속박합니다. 선비들 개개인이 이런 데서 벗어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풍기도 그들이 감히 벗어나게 허용하지 않습니다.

선비들은 말은 스스로 터득한 것을 소중히 여기고, 배움은 기록하고 묻는 것을 천하게 여깁니다.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이치가 시골 서당방 훈장의 서탁을 뒤덮고 있지마는, 시서(詩書)와 춘추(春秋)의 학설은 노성한 학자와 명망 있는 학자들조차도 유난히도 도외시합니다. 족하께서는 그 연유를 궁리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주자가 정리하고 분석하며 교정하고 증명한 저작 가운데 사서(四書)만큼 철저하게 자세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선배들을 본떴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본뜬 사람을 선비라고 말한다면 어느 사람인들 선비라고 부르지 못할 것이며, 그렇다면 유림전에 이름을 올릴 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직도 아이들에게 《대학(大學)》의 주(註)를 가르칠 때의 옛일을 기억합니다. ‘지극히 선한 지경에 그쳐서는 옮기지 않는다[止於至善之地而不遷]’는 대목에 이르러서 저는 학도들에게 “이 글의 ‘그칠 지(止)’는 마땅히 ‘이를 지(至)’로 써야 한다. 만약 ‘그칠 지’자였다면 옮기지 않는다는 ‘불천(不遷)’은 연문(衍文)이다.”라고 가르쳤지요. 그때 곁에 있던 손님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는 손을 내저으며 “망령된 말을 해서는 안 되지요! 주자(朱子)께서 어찌 한 글자라도 틀린 주를 용납하겠소이까?” 하였습니다.

저는 웃으며 “주자야 설령 오류가 없다손 치더라도 전해 베껴 쓴 자나 판각(板刻)한 자까지 모두 오류가 없을까요?”하고 대꾸하였습니다. 허나 그 손님은 믿지를 않더군요. 저는 하는 수 없이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에 실린 대학의 주를 가져다가 입증을 시켜주었더니 그제야 비로소 의심을 풀더군요.

이런 사람은 정말 심한 경우에 속하기는 하지만, 대다수가 식견이 이렇습니다. 저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역사에는 도학전(道學傳), 문원전(文苑傳), 순리전(循吏傳), 충의전(忠義傳), 효열전(孝烈傳), 방기전(方技傳)과 같은 많은 항목에는 전기를 써줄 만한 사람이 없지 않으나 오로지 유림(儒林)만은 전기를 써서 전할 사람이 없다. 만약에 유림전에 굳이 전기를 써야겠다면, 비록 다소 지나치기는 할지라도 조성경(趙成卿)³ 같은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 선비의 수가 너무도 적막합니다.

△▲ 강희언(姜熙彦,1710∼?)_사인삼경도(士人三景圖) 중 사인시음도(士人詩吟圖)_부분

- 서형수(徐瀅修), 〈답이검서덕무(答李檢書德懋)〉, 《명고전집(明皐全集)》

1) 주죽타는 청나라 학자 주이존(朱彛尊, 1629~1709)이다. '타'는 [土+宅]. 이 내용은 《폭서정집(曝書亭集)》 32권, 〈사관에서 총재에게 보내는 서한5[史館上總裁第五書]〉에 나온다.
2) 이 구절은 《논어(論語)》자로(子路) 편에 나온다.
3) 곧, 조성기(趙聖期, 1638∼1689)로서 성경(成卿)은 그의 자이다. 조선 후기의 저명한 학자로 본관은 임천(林川). 호는 졸수재(拙修齋)이다.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61집 《명고전집(明皐全集)》5권 서(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해설


이덕무가 서형수에게 〈유림전(儒林傳)〉의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자, 서형수는 부탁을 수락하면서 조선의 유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예상과는 달리 혹독하리만큼 조선 선비의 행태와 수준을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이 지나치게 가혹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타당한 측면도 없지 않다.

조선왕조는 모든 권리와 혜택을 양반에 집중하였는데, 그 양반의 대부분은 곧 선비였다. 나라에서 4백년 동안 선비를 양성하고 대우하였건마는, 서형수는 그 안에 선비[儒]로서 써줄 만한 존재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가 비판하는 선비는 완고한 언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경전의 구절에만 매몰되어 있으며, 따지는 거라곤 주자(朱子)의 이견에 불과하고, 저술은 자잘한 예법을 따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제 주견만 옳게 여겨 서로들 치고받고 싸우는 짓거리나 벌인다. 게다가 이런 선비의 풍기에서 누구도 빠져 나가기가 어렵다.

서형수가 자기 사회의 선비를 가혹하게 비판하고 나선 데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반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그의 혹독한 지적은 지금에도 적용할 만한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