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전(儒林傳)에 넣을 서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저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책 사이에 이름을 끼워 넣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니 감히 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물정에 어둡고 앞뒤 꽉 막힌 제 소견으로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이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나라가 4백년 동안 문화를 통해 나라를 융성하게 다스리고 인재를 왕성하게 배출하였으므로 찬란하게 기록할 거리가 없지 않습니다마는, 유독 선비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일까요?
자기 세계를 튼튼하게 구축한 사람을 선비라 하고, 문화적 역량이 큰 사람을 선비라 하고, 도(道)로써 민심을 얻은 자를 선비라 하고, 고금을 잘 구별하는 사람을 선비라 하고,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에 두루 통달한 사람을 선비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주죽타(朱竹타)¹ 선생이 말한 선비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두루 헤아려 볼 때, 성취한 수준이 만에 하나라도 저 기준의 근사치에 접근한 선비가 있을까요?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른바 선비라고 부르는 존재를 얼추 알만 합니다. 완고할 정도로 말에는 신의가 있고 행동을 꼭 실천하는 사람²과 부지런히 책 구절을 파고드는 데 열중하는 사람이지요. 그들이 따지고 다투는 것은 주자(朱子)가 초년과 만년에 주장한 것이 다르니 같니 하는 것이고, 그들이 저술한 서책은 잡복(雜服)과 절하는 예법에서 어느 것이 앞서고 뒤서느냐 하는 것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게다가 먼저 배운 것을 주장으로 삼아 다른 많은 사람을 궁벽한 시골뜨기로 배척해 버립니다. 분분한 학설이 너무 많다 보니 달리 주장하는 자를 개인적 원수로 여기고, 남의 결점을 지나치게 모질게 비판하며 너무 심하게 속박합니다. 선비들 개개인이 이런 데서 벗어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풍기도 그들이 감히 벗어나게 허용하지 않습니다.
선비들은 말은 스스로 터득한 것을 소중히 여기고, 배움은 기록하고 묻는 것을 천하게 여깁니다.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이치가 시골 서당방 훈장의 서탁을 뒤덮고 있지마는, 시서(詩書)와 춘추(春秋)의 학설은 노성한 학자와 명망 있는 학자들조차도 유난히도 도외시합니다. 족하께서는 그 연유를 궁리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주자가 정리하고 분석하며 교정하고 증명한 저작 가운데 사서(四書)만큼 철저하게 자세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선배들을 본떴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본뜬 사람을 선비라고 말한다면 어느 사람인들 선비라고 부르지 못할 것이며, 그렇다면 유림전에 이름을 올릴 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직도 아이들에게 《대학(大學)》의 주(註)를 가르칠 때의 옛일을 기억합니다. ‘지극히 선한 지경에 그쳐서는 옮기지 않는다[止於至善之地而不遷]’는 대목에 이르러서 저는 학도들에게 “이 글의 ‘그칠 지(止)’는 마땅히 ‘이를 지(至)’로 써야 한다. 만약 ‘그칠 지’자였다면 옮기지 않는다는 ‘불천(不遷)’은 연문(衍文)이다.”라고 가르쳤지요. 그때 곁에 있던 손님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는 손을 내저으며 “망령된 말을 해서는 안 되지요! 주자(朱子)께서 어찌 한 글자라도 틀린 주를 용납하겠소이까?” 하였습니다.
저는 웃으며 “주자야 설령 오류가 없다손 치더라도 전해 베껴 쓴 자나 판각(板刻)한 자까지 모두 오류가 없을까요?”하고 대꾸하였습니다. 허나 그 손님은 믿지를 않더군요. 저는 하는 수 없이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에 실린 대학의 주를 가져다가 입증을 시켜주었더니 그제야 비로소 의심을 풀더군요.
이런 사람은 정말 심한 경우에 속하기는 하지만, 대다수가 식견이 이렇습니다. 저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역사에는 도학전(道學傳), 문원전(文苑傳), 순리전(循吏傳), 충의전(忠義傳), 효열전(孝烈傳), 방기전(方技傳)과 같은 많은 항목에는 전기를 써줄 만한 사람이 없지 않으나 오로지 유림(儒林)만은 전기를 써서 전할 사람이 없다. 만약에 유림전에 굳이 전기를 써야겠다면, 비록 다소 지나치기는 할지라도 조성경(趙成卿)³ 같은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 선비의 수가 너무도 적막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