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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고전의 향기030 서울을 등지는 벗에게

by 혜당이민지 2008. 11. 6.

고전의 향기030      

서울을 등지는 벗에게

나는 가경(嘉慶) 시절에 태어나 도광(道光) 시절에 늙었으므로 더불어 노닌 친구들이나 뒤좇아 다닌 어른들이 오로지 가경 도광 시절 사람뿐입니다. 가경 도광 시절이라도 일만 리 밖에서 태어났거나 오랑캐 지역의 들판에 사는 사람이라면, 둘 사이에 서로 오가는 소식이 없어 목소리고 얼굴이고 접하지 못합니다. 마치 먼 훗날 사람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과 같지요. 둘 사이에 소식이 오간다고 합시다. 서로 만나보지 못한다면, 역사책 속에서 옛사람의 이름을 보는 것과 다를 것이 있을까요?

나는 어리석고 촌스러워 남들이 저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대가 나를 잘 알지 못할 것이므로, 먼 훗날의 사람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듯이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이 옳습니다. 반면에 그대는 일찍부터 학교에서 공부하고 진사시험에 급제하였습니다. 그대의 이름을 나는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면, 내가 그대를 보는 것이 역사책 속에서 옛사람의 이름을 보는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갑작스레 그대를 만났으니 이것은 먼 옛날 사람과 먼 훗날 사람이 오늘 이 순간에 만난 셈입니다. 이야말로 하늘과 땅 사이의 기묘한 인연이 아닐는지요?

그렇다고는 하나, 먼 옛날 제왕이 백성들을 네 부류로 구별한 뒤로 선비는 농사꾼과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았고, 상인은 공인(工人)을 찾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선비 부류에 속한다 할지라도 노장(老莊)을 추구하는 자는 불교를 숭상하는 자와는 가는 길을 달리 했고, 양자(楊子)를 믿는 자는 묵자(墨子)를 믿는 자와는 지향점이 달랐습니다. 예로부터 뜻을 함께 하고 도(道)가 합치되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백성들에게는 네 등급의 구별이 있고, 선비에게는 네 가지 편당(偏黨)이 있습니다. 다른 부류의 사람과는 앉는 자리를 구별한 다음에야 앉고, 말을 조심스럽게 고르고 나서야 이야기를 꺼내지요. 눈을 치켜뜨고 상대를 노려보거나 멈칫멈칫 조심해야 할 만큼 창과 방패가 으스스하게 벌여 있는 꼴입니다. 아! 오늘날의 벗을 사귀는 도리가 또 어쩌면 그리도 차별이 심할까요?

그러나 나와 그대는 앞서 말한 여러 가지 걱정이 없어서 늘 속마음을 드러내고, 반가워하는 눈길을 주고받지요. 따라서 속 시원하게 마음을 털어놔서 숨기는 사연이 조금도 없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고개를 수그린 그대의 모습에서는 멍하니 무언가 상실한 느낌이 들고, 고개를 치켜든 그대의 모습에서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고민하는 느낌이 듭니다. 속이 뒤틀리고 불평이 쌓인 듯하며, 원망하고 슬퍼하는 듯합니다. 비록 슬픔을 말하지는 않지만 절절한 슬픔을 가슴 안에 담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그것이 대체 무엇일까요?

대저 사람이 태어나면, 활과 화살을 걸어놓고 시와 글을 가르칩니다. 천지사방에 뜻을 두게 하고 만물을 통섭하기 위해서지요. 이 우주 사이에 벌어지는 일 가운데 우리 분수 안의 일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마는, 덕을 세우는 것과 입언(立言)하는 것은 궁지에 몰린 군자가 할 일이요, 천하를 두루 선(善)하게 만드는 것은 일이 잘 풀리는 군자가 할 일입니다. 나와 그대는 궁지에 몰린 자와 일이 잘 풀리는 자 가운데 어디에 속할까요?

선비로서 불우하게 지낸 자가 고금에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것도 아니고, 학문이 올바르지 않은 것도 아니며, 처한 시대가 태평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고받는 대화의 끝에 이르면 어쩔 도리 없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리고 맙니다.

그러나 맹자는 “하늘의 때는 땅이 주는 이익만 못하고, 땅이 주는 이익은 사람 사이의 화합만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람 사이의 화합이 극에 달하면 하늘과 땅도 뒤로 물러나 들을 수밖에 없지요. 이것이 어찌 생명의 본성이며 하늘에서 정해놓은 것이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현기(玄錡)와 정수동(鄭壽銅)은 저자거리에서 미쳐 노래 부르거나 날마다 술을 퍼 마시며, 이몽관(李夢觀)과 유산초(柳山樵)는 신병을 핑계로 문을 걸어 닫고 나오지 않은 채, 머리에 망건을 쓰지 않은 지 벌써 십 년째입니다. 이 몇 분들 중에서 어떤 분은 울울답답하여 펄쩍펄쩍 뛰면서 불평한 기운을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자취를 숨기고 재능을 감춰서 자신들의 성명을 드러내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 행위가 어찌 그분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한 것일까요? 부득이하여 그렇게 행동하는 것임을 자주 목격하였습니다.

이제 그대가 또 영예로운 길을 헌신짝처럼 벗어던지고 영춘(永春, 충북 단양) 산골짜기로 완전히 들어갑니다. 아아! 그대의 뜻을 잘 알 만합니다! 나는 재주가 없기는 하나 위의 여러 분들이 지닌 병통을 지닌 데다가 의지는 한결 큽니다. 현기와 정수동의 행동을 하려 하지만 신병이 있어 하지 못하고, 이몽관과 유산초의 행동을 흉내내려 하지만 남들이 말을 많이 할까봐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그대가 가는 길을 따라가자니 형편상 편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답답하게 그대를 마주보고 있으려니 바보가 된 듯 미치광이가 된 듯 서성대고 안절부절 못합니다. 누가 그렇게 시키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아아! 슬픕니다! 태화산(太華山)의 묏부리가 푸르러서인가요? 금수(錦水)의 물결이 맑아서인가요? 제 한 몸 착하게 살다가 세상을 버리고 영영 등지니 지팡이 잡은 어른¹과 같은 은사라고 해야 할까요? 아침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독서하니 동소남(董邵南)² 같은 가난뱅이라고 할까요? 벼슬길로 가는 지름길에 서있는 종남산(終南山) 사람이라고³ 해야 할까요? 아니면 막다른 길에 이르러 수레를 돌이키는 완보병(阮步兵)⁴이라고 해야 할까요?

1) 원문은 하소장인(荷篠丈人)으로 《고사전(高士傳)》에 나오는 은사이다. 공자를 뒤따르던 자로(子路)가 그에게 공자가 간 길을 묻자 그는 “사지를 움직여 일하지 않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선생인가?”라며 계속 김을 맸다. 자로가 그의 집에서 하루를 자고 이튿날 공자에게 그의 사연을 말하자 공자가 은사라고 하며 다시 자로를 시켜 찾게 했으나 그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2) 당(唐)나라 사람으로 안풍(安豊)에 은거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부모를 받들고 처자를 거느리며 살았다. 한유(韓愈)가 그를 높이 평가한 시와 산문을 지었다.
3) 《신당서(新唐書)》 〈노장용전(盧藏用傳)〉에 나오는 내용이다. 노장용이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했다가 뒤에 조정에 나가 높은 벼슬을 하였다. 그가 승정(承禎)이란 사람이 시골 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서 손으로 종남산을 가리키며 “여기에도 아주 아름다운 산이 있거늘 굳이 천태산(天台山)까지 갈 필요가 있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승정은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보기에는 종남산은 벼슬길로 가는 지름길일 뿐일세.”
4) 중국 진(晉)나라 때 보병교위(步兵校尉)를 역임한 완적(阮籍)이다. 완적은 때때로 마음 내키는 대로 수레를 몰고 가다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막다른 길에 이르면 통곡하고 돌아왔다.

떠나시오, 그대여! 떠난들 어디로 가겠소! 해와 달은 밝게 빛나고, 밝으신 임금님이 위에 계신다오. 그대여! 그대여! 떠난들 어디로 향하겠소?
떠나시오, 그대여! 떠나서는 뒤도 돌아보지 마시오! 풍년이 들어 곡식이 넉넉하면 세금을 바치고, 산에서는 나무하고 물에서는 낚시하면 맛좋은 음식이 갖추어지겠지요. 좋은 혼처는 아닐지라도 며느리를 얻어 혼사를 맺겠지요.

편안히 서책을 즐기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기댈 곳을 마련하여 학(鶴)처럼 사는 노인이 되시오. 어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만들 터이니 우리의 도(道)가 동쪽으로 옮겨갔군요. 그대의 아름다운 덕을 힘써 가꾸어 그대의 끝맺음까지 생각하시오. 그리고 그대의 소식을 금인 양 옥인 양 아끼지 말고 때때로 좋은 바람결에 들려주시오. 내 비록 그대를 따르지는 못하나 역사책 속에서 옛사람의 이름을 보듯이 하겠소.

△▲ 송석원시사아회도 _ 이인문그림 _ 당시 여항 문인들의 시사모임을 묘사한 그림으로, 왼쪽 중앙 바위 아래에 문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 장지완(張之琬), 〈송안상사서(送安上舍序)〉, 《비연상초(斐然箱抄)》

해설


글쓴이는 19세기에 여항인 문학을 선도한 장지완(張之琬)이다. 진사 신분인 안(安) 아무개가 더 이상 서울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충북 단양의 영춘(永春)으로 떠난다.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가 시골로 완전히 떠나는 것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친구가 어떤 사정 때문에 낙향하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글에 나온 내용으로 보아 그는 양반이 아니라 중인 신분 이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진사가 되었으므로 더 나은 공부나 교유, 출세를 위해 서울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는 오히려 시골로 떠난다. 당시의 조선은 개인의 노력만 가지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당시 서울에서 지식인들이 살아가는 형편을 잘 보여준다.

친구에게 글쓴이는 힘든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산골에 가서 사는 것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고 위로한다. 문제는 서울에서 견디기 힘든 것은 친구만이 아니라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아니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그래서 저자거리에서 미쳐 노래 부르거나 날마다 술을 퍼 마시는 사람도 있고, 신병을 핑계로 문을 걸어 닫고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런 행동을 한다고 본문에 말한 네 사람은 저자와 친분이 깊은 당시의 중인 문사들이다. 자신의 처지도 저들과 다르지 않지만 자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상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는 친구의 뒤를 따르지도 못한다. 그러니 동병상련의 정이 뭉클 솟지 않을 수 없다.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신분과 당파와 생각들, 그런 속에서 속을 터놓고 지낼 정말 친한 친구를 먼 곳으로 보내야 하는 슬픔이 이 글에는 짙게 깔려 있다. 글의 실마리를 벗을 사귀는 문제로 열고 글의 마지막을 풍편에 전해오는 친구의 소식을 기다린다고 하여 수미(首尾)가 관통하고 있다.

친구의 낙향을 주제로 하고 비장미가 돋보이는 문체를 구사한 이 글은 박제가(朴齊家)의 〈궁핍한 날의 벗[送白永叔基麟峽序]〉과 맥이 통한다. 주제나 문체가 박제가의 글과 매우 닮아서 영향을 짙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