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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칼럼

한 도학자(道學者)의 지나친 고집

by 혜당이민지 2010. 11. 8.

한 도학자(道學者)의 지나친 고집

 

  조선의 도학자는 원칙을 바로 세우고 각고의 노력으로 그것을 지켜내는 올곧은 지식인의 표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로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는 맑은 힘이 도학자에게는 있었다. 그렇지만 걸핏하면 원칙만을 고수하고 시의(時宜)에 따라 융통할 줄 몰라서 한갓 부질없는 고집을 부릴 때도 많았다. 그래서 도학자의 이미지는 늘 강직함과 고집스러움이 겹쳐서 떠오르는 것이다. 세상일은 다양하고 그 일들을 하는 사람들도 저마다 다른 식견과 기량을 갖고 있다. 하나의 원칙을 모든 곳에 적용해서는 안 되듯이 자기가 서야 할 자리를 벗어나서 내 생각을 남에게까지 쉽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조선에 도학정치를 구현하려 했던 개혁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안타까운 실패의 원인을 잘 보여주는 글 한 편을 소개한다.

  회령부(會寧府) 성 아래의 야인 속고내(速古乃)란 자가 은밀한 곳에 사는 야인들과 몰래 연통하여 와서 갑산부(甲山府)를 침범하여 사람과 가축을 많이 약탈하였지요. 그래서 변장(邊將)를 처벌하려 하니, 도망가 버렸습니다. 무인년에 남도병사(南道兵使)가 은밀히 장계를 올려 “속고내가 갑산 근처에 몰래 왕래하며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데 무리가 많아 잡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저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군사를 출동해 사로잡으소서.” 하였습니다. 조정의 의론은 먼저 본도(本道)에 은밀히 하유(下諭)하고 이지방(李之芳)을 보내 감사(監司)ㆍ병사(兵使)와 함께 속고내를 잡아서 처벌하기로 하니, 상감께서 선정전(宣政殿)에 납시어 연회를 열고 어의(御衣)와 궁시(弓矢)를 하사하고 삼공(三公)과 병조(兵曹), 지변재상(知邊宰相)들이 둘러앉아 상감을 뫼시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이때 부제학이었는데 청대(請對)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이 일은 속임수를 쓰는 것이고 바르지 못하니,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가 전혀 아니고 바로 몰래 좀도둑질이나 하는 도적의 계책과 같습니다. 당당한 큰 조정으로서 일개 작은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계책을 써서 국가를 모욕하고 위엄을 손상시키니, 신은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시니, 상감께서 곧바로 다시 의논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에 좌우의 신하들이 다투어 나아가 아뢰기를 “병가(兵家)에는 정공과 기습이 있고 오랑캐를 막는 데는 정도와 권도(權道)가 있으니, 임기응변해야지 한 가지 주장만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논의가 이미 합일되었으니,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고, 병조판서 유담년(柳聃年)이 나아가 말하기를 “논밭 가는 일은 남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하는 법입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북방을 출입하여 저 오랑캐의 실정을 신이 이미 잘 알고 있으니, 청컨대 신의 말을 들으소서. 오활한 선비의 말은 형세상 다 따르기 어렵습니다.” 하였습니다. 상감께서 그래도 듣지 않으니, 재추(宰樞)들이 모두 불평을 품고 자리를 파하였습니다.

 

[會寧府城底野人速古乃者, 潛與深處野人通謀, 來犯甲山府, 多掠人畜. 邊將將治之, 亡去. 戊寅, 南道兵使密啓‘速古乃於甲山近處, 潛往來漁獵, 徒衆難捕, 請出其不意, 發軍掩捕.’ 朝議先密諭于本道, 遣李之芳, 同監司兵使捕獲置法. 上御宣政殿, 賜宴及御衣弓矢, 三公及該曹知邊宰相環侍. 先生時爲副提學, 請對進曰: “此事譎而不正, 殊非王者禦戎之道, 正類盜賊穿窬之謀. 以堂堂大朝, 爲一幺麽醜虜, 敢行盜賊之謀, 辱國損威, 臣竊恥之.” 上卽命更議, 左右爭進曰: “兵家有奇正, 禦戎有經權, 臨機制變, 不可執一論也. 詢謀已同, 不可以一人之言遽改也.” 兵曹判書柳聃年進曰: “耕當問奴, 織當問婢. 臣自少出入北門, 彼虜之情, 臣已備諳, 請聽臣言. 迂儒之言, 勢難盡從.” 上猶不聽, 諸宰樞皆懷不平而罷.]

 

- 이황(李滉), 〈조대우에게 답하다[答趙大宇]〉, 《퇴계집(退溪集》

 

▶ 신위_방대도_국립중앙박물관 소장_우리그림 백가지 인용

 

[해설]

  중종 13년(1518)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정암 조광조의 아들인 조용(趙容)에게 보낸 편지이다.

  원래 홍인우(洪仁祐)가 지은 부친 정암의 행장(行狀)을 조용이 퇴계에게 보내와서 비문(碑文)을 부탁하였다. 퇴계가 비문을 짓는 일을 극구 사양하고 행장이 소략하니 사적을 두루 찾아서 행장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정암의 입조(立朝) 사실을 적어서 보내준 것이다. 그러자 조용이 이번에는 행장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고 퇴계는 비문을 거절한 터라 행장마저 거절할 수 없다 하여 〈정암 조선생 행장(靜庵趙先生行狀)〉을 지었다.

  우리 백성과 가축을 노략질하는 여진족 속고내(速古乃)가 은신하고 있는 곳을 알았으니, 기습 공격하여 소탕하기로 조정의 논의가 결정되었다. 그런데도 정암이 당당한 큰 조정으로서 일개 작은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계책을 쓸 수 없다고 반대하자 중종은 정암의 뜻을 따라 다시 의논하라고 지시한다. 정암의 주장에 반박한 신하들의 말, 특히 ‘논밭 가는 일은 남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하는 법’이라고 한 병조판서 유담년의 말은 지극히 사리에 맞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종은 끝내 이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으니, 정암에 대한 중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혼암(昏暗)한 군주였던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은 개혁을 단행하여 서정을 쇄신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였다. 이러한 중종의 욕구에 부응할 만한 인물로 떠오른 인물이 정암이었다. 정암은 34세에 벼슬길에 올라 불과 4년만에 사헌부 대사헌라는 높은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정암의 지나친 원칙주의와 고집에 중종도 지쳐갔고 그 틈을 타서 개혁을 싫어하는 훈구파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의 터무니없는 무함으로 기묘사화를 일으켜 정암 일파를 제거하였다. 소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불리는 신진사류들이 대거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이 참사로 조선 지식인의 원기는 크게 손상되고 말았다.

  율곡(栗谷)은 “하늘이 그 분의 뜻을 펴지 못하게 하시면서 어찌 그와 같은 사람을 내셨을까.”라고 탄식하였고, 퇴계는 “조정암(趙靜庵)은 타고난 자질이 비록 훌륭하였으나 학문이 충실하지 못하여 시행한 일에 지나침이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실패하고 말았다. 만일 학문이 충실하고 덕기(德器)가 완성된 뒤에 세상에 나가서 세상일을 담당하였더라면 그 성취한 바를 쉽게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정암이 퇴계의 말처럼 학문과 식견이 더욱 성숙한 뒤에 세상에 나왔더라면 어떠했을까. 퇴계에 와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사림정치가 한 걸음 더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조선의 도학자들이 산림에 은거하여 근신하는 기풍이 생긴 것은 기묘사화의 끔찍한 참변이 있은 뒤부터다. 어쩌면 선비들이 근신하여 내공을 더 깊이 쌓은 뒤에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그 이후의 사림정치가 그렇게 오래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림정치로 세상은 보다 정화되었겠지만 그 기간이 너무 길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조선이 변화해야 할 때 변화하지 못해서 우리가 너무도 아픈 시련을 겪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정암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보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다 부질없는 것이다. 다만 염우(廉隅)가 깎여서 둥글둥글한 사람들만 설쳐대는 오늘날 세상에 정녕 정암 같은 오활하고 고지식한 원칙주의자가 꼭 한 분이라도 나와서 세상을 후련히 질타해 주었으면 좋겠다.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 주요저서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2007)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 주요역서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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