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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칼럼

벼슬길에서 물러나는 뜻은

by 혜당이민지 2010. 3. 7.

고전의 향기 - 백 세 번째 이야기

벼슬길에서 물러나는 뜻은

  세상을 위하는 길이 어디 세상에 나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무언가 드러난 일을 하는 데만 있다던가. 자기의 심신도 안돈(安頓)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위한 일을 한답시고 나서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매화가 반드시 흰 눈을 업신여기는 기개를 뽐내야만 매화다운 것인가. 밝은 달빛 속에 자태를 감추고 은은한 암향(暗香)을 부동(浮動)하는 게 오히려 매화다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근자에 들으니, 남시보(南時甫)1)가 나를 두고 위아지학(爲我之學)2)을 한다고 했다 합디다. 위아지학은 내가 본디 하지 않지만 나의 행적이 위아지학과 매우 흡사하기에 그 말을 듣고는 식은땀이 흘러 옷을 적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겉으로 드러난 행적만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면 양씨(楊氏)3)가 아니면서도 위아(爲我)하는 듯이 보이는 옛사람들이 많지 않겠습니까.
  주자(朱子)는 불자(佛者)의 말을 인용하여,

  이 심신을 가지고 모든 세상의 중생들을 받드는 것 將此心身奉塵刹
  이것을 이름하여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하네 是則名爲報佛恩4)

하였고, 또 두보(杜甫)의 시를 인용하여,

  사방 이웃들이 쟁기를 잡고 나서니 四隣耒耜出
  구태여 우리 집까지 잡을 것 있으랴 何必吾家操5)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연평(李延平)6)은 말하기를,
  “지금 같은 때에는 그저 궁벽한 곳에서 베옷을 입고 나무 열매를 먹으며 평소에 하던 공부에나 힘써야 할 것이다.”7)
하였고, 양귀산(楊龜山)8)의 시에,

  듬성하게 핀 꽃잎으로 경솔히 흰 눈과 싸우지 말고 莫把疎英輕鬪雪
  밝은 달빛 가운데 맑은 자태를 잘 감추라 好藏淸艶月明中9)

하였습니다. 이 분들이 모두 위아지학을 하였단 말입니까.

 

1) 남시보(南時甫) :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양명학자(陽明學者)인 남언경(南彦經 : 1528~1594)을 가리킨다. 시보는 자이고, 호는 정재(靜齋) 또는 동강(東岡)이며,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2) 위아지학(爲我之學) :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하는 학문이란 뜻으로 묵적(墨翟)의 겸애설(兼愛說)과 상반된다. 맹자(孟子)가 “양자는 자신을 위함만 취하니 자신의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더라도 하지 않는다.[楊子取爲我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양자(楊子)는 양주(楊朱)를 가리킨다.
3) 양씨(楊氏) : 양주(楊朱)를 가리킨다.
4) 《능엄경(楞嚴經)》에서 아난(阿難)이 한 말이다. 《능엄경》에는 ‘身心’이 ‘深心’으로 되어 있는데 주자가 인용하면서 ‘身心’이라 하였다. 진찰(塵刹)은 진진찰찰(塵塵刹刹)의 준말로 불교에서 온 우주의 수없이 많은 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능엄경》의 주석에는 “성과(聖果)를 얻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불은(佛恩)을 갚는 것과는 상관이 없지만 이것으로써 보답하지 못하는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삼는다.” 하였다.
5) 두보(杜甫)의 시〈대우(大雨)〉에 나오는 구절이다. 위 《능엄경》의 구절과 함께 《주자대전(朱子大全)》 36권〈답진동보(答陳同甫)〉에 실려 있다.
6) 이연평(李延平) : 송(宋)나라 학자 이통(李侗 : 1093~1163)을 가리킨다. 연평은 호이고 자는 원중(愿中),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양시(楊時)의 제자인 나종언(羅從彦)에 수학하였고 주자(朱子)의 스승이다.
7) 《연평답문(延平答問)》에 실려 있다.
8) 양귀산(楊龜山:1053〜1135) : 북송(北宋)의 학자 양시(楊時)를 가리킨다. 그의 자는 중립(中立), 호는 귀산(龜山)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제자로 사양좌(謝良佐), 유작(游酢), 여대림(呂大臨)과 함께 ‘정문사선생(程門四先生)’으로 일컬어진다.
9) 《양송명현소집(兩宋名賢小集)》 97권에서〈제궁관매기강후(諸宮觀梅寄康侯)〉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 이황(李滉),〈기명언에게 답함[答奇明彦]〉,《퇴계집(退溪集)》

 

▶ 묵매_조희룡_국립중앙박물관 소장_우리 그림 백가지(현암사) 인용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9집《퇴계집(退溪集)》권17, 서(書),〈답기명언(答奇明彦)〉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해설]

  이 글은 융경(隆慶) 정묘년(1567) 9월 21일,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편지에 답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이 해 8월 10일, 예조판서에서 해임된 퇴계가 명종(明宗)의 인산(因山)이 끝나기도 전에 곧바로 귀향하자 세상에서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평소 퇴계를 존경하던 고봉도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 출처(出處)의 도리에 맞지 않다고 따졌고 퇴계가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퇴계가 걸핏하면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니, 당시 사람들은 퇴계를 두고 산새[山禽]라고 비아냥거렸다. 자신만을 위하고 세상을 위할 줄 모른다는 남시보의 말은 퇴계를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의 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퇴계는 옛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반드시 세상에 나아가 무엇인가 하는 것만이 세상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주자는 세상에 진출해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하는 진량(陳良)에게 안연(顔淵)과 같이 독선기신(獨善其身)하는 삶을 삶으로써 세상의 학자들로 하여금 학문의 바른 길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도 임금의 은혜에 대한 보답 아닌 보답이라 하였다. 그리고 석가의 제자인 아난(阿難)의 말을 인용,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진정 불은(佛恩)에 보답하는 길이듯이 직접적인 보답만이 보답이 아니라고 하였다. 두보의 시는 오랜 가뭄 끝에 흡족한 단비가 내릴 때의 농촌 풍경을 읊은 것이다. 주자는 이 시를 인용하여 남들이 다 세상에 진출한다고 해서 덩달아 나설 것이 아니라 나는 내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을 은유(隱喩)하였다. 양귀산의 시는 매화를 읊은 것이다. 굳이 차가운 눈과 맞서서 기개를 뽐내지 말고 밝은 달빛 아래 자태를 감추는 것이 좋다고 매화에게 말한 것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를 표현하느라 광장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오늘날 씹을수록 깊은 맛이 느껴지는 말들이다.

  퇴계는 당시로서는 장년을 지나 노년에 접어드는 나이인 43세 때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처음 얻어 보고는 그야말로 심취하였다. 그래서 이 책을 가지고 서둘러 낙향하였고, 이후로 퇴계의 삶은 오로지 진리를 찾아 학문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퇴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와 세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겼다.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자기를 불러도 번번이 고사(固辭)하였고 벼슬길에 나가면 곧바로 사퇴하곤 했던 것이다.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해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하였거니와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을까 늘 불안한 사람이 많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명사일수록 이런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명리(名利)를 얻을 수만 있다면 염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니, 이제 염치라는 말은 입에 올리기도 민망하다. 옛사람들은 무턱대고 세상에 진취(進取)하는 것만을 가치 있는 일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뜻대로 사는, 은일(隱逸)의 삶을 더욱 값진 것으로 여겼다.

  참으로 자기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참으로 세상을 위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를 쫓아 분주한 나날들, 고인(古人)을 생각하면 늘 부끄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