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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칼럼

조선시대로 들어가는 관문,『조선왕조실록』

by 혜당이민지 2010. 3. 19.

조선시대로 들어가는 관문,『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조선왕조실록』은 1대 태조로부터 25대 철종에 이르는 472년(1392-1863)간의 기록을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왕조의 공식 국가기록이다. 정족산본 완질 분량의 경우 1,707권 1,187책(약 6,400만자)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으로서 조선시대의 정치ㆍ외교ㆍ경제ㆍ군사ㆍ법률ㆍ사상ㆍ생활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진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조선왕조실록』하면 대개 왕의 주변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 중심으로 기록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코끼리, 장금이, 공길이 등 당시 생활사의 면모를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몇 가지 기록들을 보자.



  일본 국왕 원의지(源義持)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명하여 이것을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하니, 날마다, 콩 4ㆍ5두(斗)씩을 소비하였다.[日本國王源義持, 遣使獻象。象, 我國未嘗有也。命司僕養之, 日費豆四五斗。]
- 『태종실록』, 태종 11년(1411년) 2월 22일


  전 공조 전서(工曹典書) 이우(李瑀)가 죽었다. 처음에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순상(馴象)을 바치므로 삼군부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가보고, 그 꼴이 추함을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였다. [前工曹典書李瑀死。 初, 日本國王遣使獻馴象, 命畜于三軍府。瑀以奇獸往見之, 哂其形醜而唾之, 象怒, 踏殺之。]
- 『태종실록』, 태종 12년(1412년) 12월 10일
 

  『태종실록』에는 태종 때 코끼리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에 처음으로 들어온 코끼리는 하루에 콩 4, 5말을 먹는 등 엄청난 곡식을 먹어 치워 고민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구경을 나온 관리까지 밟아 죽였으니 졸지에 코끼리는 큰 죄인이 되었다. 병조판서 유정현은 코끼리를 전라도 섬에 둘 것을 제안하였다.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는 이미 위에서 즐겨 보는 물건도 아니요,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두 사람을 다치게 했는데, 만약 법으로 말한다면 사람을 죽인 죄는 죽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일 년에 먹이는 꼴은 콩이 수백 석에 이르니, 청컨대 주공(周公)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사례를 본받아 전라도의 섬에 두게 하소서” 하니 태종이 웃으면서 그대로 따랐다.[“日本國所獻馴象, 旣非上之所玩, 亦無益於國, 觸害二人。若以法論, 則殺人者當殺, 又一年所供芻豆, 幾至數百石。 請倣驅犀象之(象)〔事〕, 置于全羅海島。” 上笑而從之。]
-『태종실록』, 태종 13년(1413년) 11월 5일


  2003년과 2004년 시청자를 사로잡고 한류(韓流) 열풍을 선도한 드라마 ‘대장금’의 주인공 장금(長今)도 실록에 등장하는 실존 의녀이다. 장금에 관한 기록은 『중종실록』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대비전의 증세가 나아지자, 국왕이 약방(藥房)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 의녀 신비와 장금(長今)에게는 각각 쌀과 콩 각 10석씩을 하사하였다. [大妃殿證候向愈, 上賞藥房有差。... 醫女信非、長今各米太十石]
- 『중종실록』, 중종 17년(1522년) 9월 5일


  전교하였다. “내가 여러달 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이 되었다. ... 의녀(醫女) 대장금(大長今)과 계금(戒今)에게는 각각 쌀과 콩을 합쳐 15석씩, 관목면(官木綿)과 정포(正布)를 각기 10필씩 내리고, 탕약 사령 등에게는 각기 차등 있게 상을 내리라.” [傳曰: “予累月未寧, 今幾差復。... 醫女大長今、戒今各米太幷十五石、官木緜正布各十匹, 湯藥使令等, 賞賜有差。”]
- 『중종실록』, 중종 28년(1533년) 2월 11일


상에게 병환이 있어 정원(政院)에서 문안을 드렸다. ... 아침에 의녀 장금이 내전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를, ‘하기(下氣)가 비로소 통하여 매우 기분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上不豫。政院問安, ... 朝, 醫女長今自內出曰: “下氣始通, 極爲大快。” 云。]
- 『중종실록』, 중종 39년(1544년) 10월 29일


  드라마 ‘대장금’은 궁중 음식의 조리법과 수라간 궁녀들의 아기자기한 모습들로 시청자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장금에 대한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위의 기록 이외에 ‘호산(護産:산모를 치료함)의 공이 있다’거나, 왕의 병환에 ‘오령산, 밀정(蜜釘) 등의 약재를 썼다’는 것에서 보이듯 약재에 밝았던 전형적인 의녀였다. 드라마 속에서는 ‘궁중음식의 달인’으로 장금을 묘사했지만, 요리사 장금은 실록의 기록에 전혀 없다. 그러나 의녀 장금에 대한 실록의 기록이 드라마 제작의 동기임은 확실하고, 장금은 실존인물이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친밀감을 갖게 하였다.

 

▶ 『연산군일기』중에서_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2005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왕의 남자’의 주인공 공길(孔吉) 또한 『연산군일기』에 등장하는 실존 배우(優人)였다. 실록의 기록을 보자.

  전교하기를, “... 본디 나례(儺禮)는 배우의 장난으로 한 가지도 볼 만한 것이 없으며, 또 배우들이 서울에 떼를 지어 모이면 표절(剽竊)하는 도둑이 되니, 앞으로는 나례를 베풀지 말아 옛날 폐단을 고치게 하라.”하였다. 이보다 앞서 우인(優人) 공길(孔吉)이 늙은 선비 장난을 하며, 아뢰기를, “전하는 요순 같은 임금이요, 나는 고요(皋陶 ) 같은 신하입니다. 요순은 어느 때나 있는 것이 아니나 고요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논어》를 외워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하니, 왕은 그 말이 불경한 데 가깝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流配)하였다. [傳曰: “若儺禮, 則皆是俳優之戲, 無一事可觀。 且優人群聚京城, 剽竊爲盜, 自今勿設儺禮, 以革舊弊。” 先是優人孔吉, 作老儒戲曰: “殿下爲堯、舜之君, 我爲皋陶之臣。 堯、舜不常有, 皋陶常得存。” 又誦《論語》曰: “君君臣臣父父子子。 君不君臣不臣, 雖有粟, 吾得而食諸?” 王以語涉不敬, 杖流遐方。]
- 『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1505년) 12월 29일


  위의 기록에서 연산군 시대에 궁중에 광대들이 자주 드나들던 상황을 알 수 있으며, 이 중 공길은 연산군의 잘못을 비판하다가 유배를 가는 용기있는 배우였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영화 「왕의 남자」는 실존인물 공길의 존재로 인해 보다 사실감 있게 제작된 것은 틀림없다. 드라마 「대장금」과 영화 「왕의 남자」의 성공에는 실록이라는 전통 문화 콘텐츠의 보고(寶庫)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 실록은 왕의 식단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도 있다. 영조는 누구보다 채식(菜食)을 하면서 건강에 신경을 쓴 왕이었다.

  내가 일생토록 얇은 옷과 거친 음식을 먹기 때문에 자전께서는 늘 염려를 하셨고, 영빈(暎嬪)도 매양 경계하기를,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였지만, 나는 지금도 병이 없으니 옷과 먹는 것이 후하지 않았던 보람이다. 모든 사람의 근력은 순전히 잘 입고 잘 먹는 데서 소모되는 것이다. 듣자니, 사대부 집에서는 초피(貂皮)의 이불과 이름도 모를 반찬이 많다고 한다. 사치가 어찌 이토록 심하게 되었는가? [“予一生薄衣惡食, 故慈殿每以爲慮, 寧嬪每戒云, ‘自奉甚薄, 老必生病’, 而吾今無病, 衣食不厚之效也。 凡人筋力, 全消於厚衣厚食。 似聞士夫家, 多有貂皮衾不知名之饌。 奢侈何至此之甚耶?”]
- 『영조실록』, 영조 26년(1750년) 2월 10일


영조는 당시 사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가운데, 자신이 병이 없는 것은 일생 동안 거친 음식을 먹고 얇은 옷으로 생활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반면에 세종은 평소에 기름진 궁중요리와 육식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성산 부원군 이직 등이 세종의 건강을 염려하여 올린 글을 보면,

졸곡(卒哭) 뒤에도 오히려 소선(素膳)을 하시어, 성체(聖體)가 파리하고 검게 되어, 여러 신하들이 바라보고 놀랍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또 전하께서 평일에 육식이 아니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시는 터인데, 이제 소선한 지도 이미 오래되어, 병환이 나실까 염려되나이다. [卒哭之後, 猶御素膳, 聖體瘦黑, 群臣望見, 莫不驚駭。且殿下平昔非肉未能進膳, 今素膳已久, 恐生疾病。]
- 『세종실록』, 세종 4년(1422년) 9월 21일


위의 기록에서 ‘전하는 육식이 아니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신다.’는 표현은 세종이 육식을 무척이나 즐겼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의 질환에 관한 기록이 50여 건에 달할 정도로 세종은 많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책무를 완수하였음이 나타난다. 육식을 즐기던 식단이 세종의 건강을 위협한 것은 아닐까?

언급한 사례에서 보듯 실록은 코끼리, 장금이, 공길이, 왕의 건강 이외에 지진, 홍수, 가뭄 상황 등 실록에 ‘이런 것까지’ 기록했을까 라는 호기심이 드는 내용들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실록이 이처럼 다양한 기록을 담을 수 있었던 것에는 사관(史官)들이 작성한 사초 이외에 관청의 업무 일지에 해당하는 시정기(時政記) 자료를 충분히 활용하여 폭넓게 당대사의 모습들을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생활사의 모든 것을 담은 ‘조선시대판 타임캡슐’이자 조선시대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선조들이 남겨준 자랑스러운 기록물 『조선왕조실록』의 다양한 내용들을 음미하고, 새 것을 창출해가는 몫은 이제 우리들에게 남겨져 있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저서
-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연구, 일지사, 2000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램덤하우스, 2003
-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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