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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칼럼

달관을 위한 책

by 혜당이민지 2009. 12. 23.

달관을 위한 책

  하루하루 바쁜 일상을 살아간다. 누구나 바쁜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면서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한다. 어찌하면 바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만사에 달관(達觀)의 마음을 얻는 것이 그 지름길이리라. 선비는 옛글을 읽어 달관의 마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내가 몇 년 이래로 봉양을 위해 사직을 청하여 전원으로 돌아왔다. 조용하게 거처하면서 아무 일을 하지 않고 때때로 고인의 책을 펼쳐보았다. 대개 맑은 이야기와 운치 있는 일 중에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바로 기록한 다음, 유형별로 편차를 매겨 《임거사결(林居四訣)》이라 하였다. 그 첫째는 달[達]이요, 둘째는 지[止]요, 셋째는 일[逸]이요, 넷째는 적[適]이다. ‘달’이 그 첫 번째를 차지한 것은 ‘달’의 경지에 이른 다음에야 능히 ‘지’와 ‘일’과 ‘적’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이라 한 것은 상하사방을 통달하는 것을 이른다. 대개 사람이 비록 두 눈이 있지만 도리어 제 몸은 볼 수가 없다. 거울을 가져다가 비추어보지만, 그 또한 일면에 그칠 뿐이다. 제 몸도 그러한데 몸 이외의 것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앞은 밝지만 뒤는 어두운 법이요, 그 가까운 것은 찾으면서도 그 먼 것은 버려두는 법이다. 부지런히 한 세상 술에 취한 듯이 비몽사몽간에 살다가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니 참으로 슬프다.

  내가 예전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 대궐로 갈 때 큰 비가 내리는 가운데 역마를 급히 몰아 달려갔다. 어떤 객점에서 한 아낙네가 앞에 아이를 앉히고 손으로 그 머리의 이를 잡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아이는 그 어미가 머리를 긁어주는 것을 좋아하고 어미는 이를 잡는 것을 좋게 여겨 둘이 서로 즐거워하는데, 거짓 없는 참다운 정이 가득했다. 처마에 낙숫물 뿌옇게 떨어지는 그 너머로 말을 타고 지나가면서 아주 잠깐 그 광경을 보고서 나도 모르게 망연자실하였다. 마침내 ‘인생의 지극한 즐거움 중에 무엇이 이것과 바꿀 것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였다. 아, 남들의 편안함은 보면서도 자기의 고생스러움은 보지 못하고, 남들의 즐거움은 알지만 자기의 근심스러움은 알지 못하니, 이는 바로 달관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오묘한 글을 채록하고 고금의 방달한 이야기를 모았다. 사람들이 한 번 읽으면 삼천세계(三千世界)1)에 문득 공화(空華)2)가 일어났다 사라지게 하고, 두 번 읽으면 열 두 개의 몸속 구멍에서 시원한 바람이 쏴하고 나오게 하며, 세 번 읽으면 표연히 홍몽(鴻濛)을 뛰어넘고 희의(希夷)3)와 하나가 되는 뜻이 들게 하여, 혼미함을 벗어나 깨달음을 얻게 하는 한 묘책이 충분히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잘 알지 못하는 이와 함께 말할 것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혀가 없는 사람과 맛에 대해 말을 나누는 것과 같으니, 혀가 없는 사람이 어찌 단 맛과 쓴 맛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겠는가?

 

1) 불교에서 이른 드넓은 세상을 말한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도 한다, 《석씨요람(釋氏要覽)》에 “수미산(須彌山) 주위에 칠산팔해(七山八海)가 있고 그 밖을 대철위산(大鐵圍山)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것이 하나의 소세계(小世界)가 되고, 그 소세계 천이 모여 소천세계(小千世界)가 되며, 소천세계 천이 모여 중천세계(中天世界)가 되며, 중천세계 천이 모여 대천세계(大千世界)가 된다고 하였다.
2) 불교에서 일체의 세간(世間)은 허공에 아른거리는 꽃과 같다고 한다. 눈에 병이 있는 사람이 허공을 쳐다보면 꽃 같은 것이 아른거리지만 실제로는 꽃이 없다는 비유를 한 것이다.
3) 《도덕경(道德經)》에 보아도 안 보이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안 들리는 것을 희(希)라 하였다.

 

  ▶ 고사탁족도_국립중앙박물관 소장_우리 그림 백가지(현암사) 인용

 

- 유언호(兪彥鎬),〈산림에 사는 네 가지 비결의 서문[林居四訣序]〉《연석(燕石)》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47집《연석(燕石)》책 1, 서(序),〈임거사결서(林居四訣序)〉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해설]

  달관이란 무엇인가? 세상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달관은 어떻게 이르는가? 18세기의 문인 유언호는 임금의 부름을 받아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도 바삐 말을 치달려 가다가, 우연히 시골 마을에서 달관의 마음을 얻었다. 낙숫물이 뿌옇게 떨어지는 너머 어떤 아낙이 아이의 머리를 긁으면서 이를 잡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보였다. 그리고 달관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의 얼굴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은 잘 알면서도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달관은 마음으로 헤아려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이나 이를 잡는 아낙이 행복해 하는 것은 눈으로 보아서 알면서도, 자신이 세사(世事)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그처럼 자유롭게 살 줄 모르는 것은 달관하지 못한 때문이다. 유언호는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다.

  유언호는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여 위리안치(圍籬安置)의 고통을 겪은 바 있다. 《장자(莊子)》를 읽어 유배살이의 괴로움에서 달관의 경지로 초탈하려 들었다. 득실(得失)과 사생(死生)이 한가지라는 《장자》의 말에 위안을 삼았다. 유언호는 빈천한 후에야 부귀함이 즐겁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콩잎과 같이 맛없는 것을 먹어보아야 고량진미(膏粱珍味)의 맛을 알고, 누더기를 입어보아야 가죽옷이 아름다운 줄 알며, 병이 나보아야 병이 들지 않은 것이 편안한 줄 알고, 시름을 겪고 나서나 시름이 없는 것이 한적한 줄 안다고 하였다. 위의 글에서 이른 대로 미혹에서 깨달음을 이루는 불가의 ‘환미성각(喚迷成覺)’이 그 방편으로 삼을 만한 말이다.

  그러나 유언호는 진정 달관에 이르지 못한 듯하다. 1772년 청명당(淸明黨)으로 지목되어 흑산도로 유배되어 서민이 되는 고통을 겪었지만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다. 승승장구하여 도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 사이 환해(宦海)의 파고를 느껴서일까, 1779년 강화유수에 임명되었지만 부모 봉양을 핑계로 대고 사직하였다. 이 무렵부터 《임거사결》을 지을 마음을 먹었다.

  그럼에도 유언호는 《임거사결》의 뜻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듬해 바로 형조판서로 승진하여 조정에 복귀하였고, 한성부 판윤, 예조판서, 우의정에까지 올랐다. 1788년에는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 재기하여 좌의정에 올랐다. 결국 전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회지에서 달관의 노래만 부르다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임거사결》은 유언호가 1781년 정국이 소용돌이치는 복잡한 시기에 엮은 책이다.4)

  세사가 복잡할 수록 달관을 꿈꾼다. 유언호는 달관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좋은 글을 뽑아 전원에서 살아가는 네 가지 비결을 글로나마 외워 그 꿈을 찬양하였다. 〈임거사결찬(林居四訣贊)〉에서 이 전원생활의 네 가지 비결에 일일이 찬송의 뜻을 다음과 같이 붙였다.

  세상에서 이 육신이란 꿈과 환각, 거품과 그림자라5),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이것이 ‘달’이라네. 무엇이 있는 것이고, 무엇이 없는 것인가? 무엇이 기쁜 것이고 무엇이 슬픈 것인가? 그저 인연을 따를 뿐, 마음에 누가 되지 않고 즐겁게 편안하여 어디를 가든 얻지 못함이 없다네. - 달(達).
  물고기는 연못에 머물러 살고 새는 숲에 머물러 사는 법. 사물은 제각기 사는 곳이 있건만 사람은 그러지 못하지. 통쾌한 데에 머물려면 성해지기 전에 쉬어야지. 그런 다음에야 마음이 고요해지니, 진리는 여기에서부터 들어오는 것이라네. 제 몸을 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바로 간괘(艮卦)의 상(象)이라네.6) - 지(止)
  육신이 있는 자는 누군들 편안하고 싶지 않겠는가? 육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면 피로함을 편안함으로 여기는 법. 저 조롱의 새를 보라. 끈에 묶여도 편안하다가 하루아침에 벗어나게 되면 구만리 높은 하늘로 날아올라, 예전 괴롭던 일을 추억하고 지금의 즐거움을 알게 된다네. - 일(逸)
  없는 것 가운데 있는 것이 있고, 환상 가운데 실상이 있는 법이라. 사물이 다가와 나와 접촉하게 되면 기뻐할 만하다네. 강과 산과 꽃과 바위, 물고기와 새와 거문고와 책 등이 이리저리 벌려져 있는데, 내가 그 사이에 있어 휘파람 불고 시를 읊조려 사물과 나를 모두 잊어버린다. - 적(適)

 

4)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중앙대학교도서관 등에 같은 이름의 책이 있는데 채제는 같아 같은 책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노자나 장자를 채록한 것이 아니므로 이 서문과 다소 차이가 있어, 자세한 고찰은 훗날을 기약한다.
5)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에 나오는 “일체유위의 법은 꿈과 같고 환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은 법,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는 구절에서 가져온 말이다.
6) 《주역》간괘(艮卦)에 “그 등에 그치면 그 몸을 보지 못한다.(艮其背, 不獲其身)”라 하였는데, 등지고 있어 물욕을 일으키지 않아 만족을 알게 되고 그러면 사심을 잊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 저서(역서)
- 해동강서시파연구, 태학사, 1995.
- 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 누워서 노니는 산수, 태학사, 2002.
- 浮休子談論, 홍익출판사, 2002.
- 조선의 문화공간(1-4), 휴머니스트, 2006.
- 우리 한시를 읽는다, 돌베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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