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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자료실/서론자료

[스크랩] 사체서세 (위항) 7

by 혜당이민지 2010. 5. 1.

 

   秦旣用篆, 奏事繁多, 篆字難成, 卽令隸人佐書, 曰隸字. 漢因行之, 獨符印璽幡信題署用篆. 隸書者, 篆之捷也. 上谷王次中始作楷法. 至靈帝好書, 時多能者而師宜官爲最, 大則一字徑丈, 小則方寸千言, 甚矜其能. 或時不持錢詣酒家飮, 因書其壁, 顧觀者以酬酒, 討錢足而滅之. 每書輒削而焚其柎. 梁鵠乃益爲版而飮之酒, 候其醉而竊其柎. 鵠卒以書至選部尙書. 宜官後爲袁術將, 今鉅鹿宋子有耿球碑, 是術所立, 其書甚工, 云是宜官也. 梁鵠奔劉表, 魏武帝破荊州, 募求鵠. 鵠之爲選部也, 魏武欲爲洛陽令, 而以爲北部尉, 故懼而自縛詣門, 署軍假司馬, 在祕書以勤書自效, 是以今者多有鵠手跡. 魏武帝懸著帳中, 及以釘壁玩之, 以爲勝宜官. 今宮殿題署多是鵠篆. 鵠宜爲大字, 邯鄲淳宜爲小字. 鵠謂淳得次中法, 然鵠之用筆盡其勢矣. 鵠弟子毛弘敎於祕書, 今八分皆弘法也. 漢末有左子邑, 小與淳鵠不同, 然亦有名.

 

   진나라는 이미 전서를 사용하였는데, 아뢸 일이 번잡하고 많아지자 전서로 이루기가 어려워 곧 노예로 하여금 쓰는 것을 돕게 하여 예서라 불렀다. 한나라는 이를 인습하고 행하여 단지 부인(符印), 새(璽), 번신(幡信), 제서(題署)에만 전서를 사용하였다. 예서라는 것은 전서를 빠르게 쓴 것이다.

   상곡의 왕차중이 비로소 해법을 만들고 영제가 글씨를 좋아함에 이르자 당시 쓸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의관을 최고라고 여겼다. 큰 것은 한 글자의 지름이 한 길이었고, 작은 것은 사방 1촌에 천 글자를 써서 매우 그 능력을 자랑하였다. 혹 때때로 돈을 지니지 않고 술집에 이르러 술을 마시고는 벽에 글씨를 쓰자 보는 사람들이 술을 보답하여 돈을 계산할 만큼 충족하면 글씨를 없앴다. 매번 글씨를 쓰고 문득 깎아 나무 조각을 불태웠다. 양곡은 이에 더하여 널빤지를 만들고 술을 마셔 취함을 기다린 뒤에 그 나무 조각을 훔쳤다.

   양곡은 마침내 글씨로 선부상서에 이르렀다. 사의관은 뒤에 원술의 장령이 되었다. 지금 거록군 송자현에 있는 <경구비(耿球碑)>는 원술이 세웠고 그 글씨는 매우 공교하여 말하길 이는 사의관이 썼다고 한다.

   양곡이 유표에게 달아나자 위 무제가 형주를 파하고 양곡을 불러 구하였다. 양곡이 선부가 되자 위 무제가 낙양령을 삼아 북부위로 만들고자 하므로 두려워 스스로 포박하여 군문에 이르렀다. 그를 군가사마에 배치하여 비서령에서 부지런히 글씨를 써서 자신의 정성을 다하게 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양곡의 필적이 많이 있다.

   위 무제는 군막에 양곡의 글씨를 매달아 붙이고 못으로 벽에 걸어놓고 완상하며 사의관보다 낫다고 여겼다. 지금 궁전의 제서는 대부분 양곡의 전서이다. 양곡은 큰 글씨 쓰기에 마땅하고, 감단순은 작은 글씨 쓰기에 마땅하다. 양곡은 감단순에게 왕차중의 필법을 얻었다고 하였으나, 양곡의 용필은 그 형세를 다하였다. 양곡의 제자 모홍이 비서령에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지금 팔분은 모두 모홍의 필법이다. 한나라 말에 좌자읍이 있었는데 조금 감단순, 양곡과 같지 않으나 또한 이름이 있었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심제 김보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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