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黃帝至三代, 其文不改. 及秦用篆書, 焚燒先典, 而古文絶矣. 漢武時, 魯恭王壞孔子宅, 得尙書春秋論語孝經. 時人已不復知有古文, 謂之科斗書. 漢世秘藏, 希得見之. 魏初傳古文者, 出於邯鄲淳. 恒祖敬侯寫淳尙書, 後以示淳, 而淳不別. 至正始中, 立三字石經, 轉失淳法, 因科斗之名, 遂效其形. 太康元年, 汲縣人盜發魏襄王冢, 得策書十餘萬言. 案敬侯所書, 猶有髣髴. 古書亦有數種, 其一卷論楚事者最爲工妙, 恒竊悅之, 故竭愚思, 以贊其美, 愧不足廁前賢之作, 冀以存古人之象焉. 古無別名, 謂之字勢云.
황제시대부터 삼대에 이르기까지 글자의 형체는 바뀌지 않았다. 진나라에 이르러 전서를 사용했고 이전의 전적을 불태워서 고문은 끊어지게 되었다. 한 무제 때 노공왕은 공자의 집을 허물어서 『상서』ㆍ『춘추』ㆍ『논어』ㆍ『효경』을 얻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고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여, 이를 ‘과두서’라고 일컬었다. 한나라 때 비장한 전적에 드물게 보였다.
위나라 초에 고문을 전한 것은 감단순(邯鄲淳)에게서 나왔다. 위항의 조부인 위기(衛覬, 敬侯)는 감단순의 서체로 『상서』를 쓴 뒤, 감단순에게 보였으나 감단순은 구별하지 못하였다. 정시(正始, 240-249) 연간에 이르러 <삼자석경>을 세웠는데 오히려 감단순의 필법을 상실했으나, ‘과두서’라는 이름 때문에 드디어 그 형태를 본받게 되었다.
태강원년(太康元年, 280)에 급현사람이 위양왕의 무덤을 도굴하여 간책에 쓰인 글 십여만 글자를 얻었다. 위기가 쓴 것을 참조해보니 오히려 비슷함이 있었다. 옛날 글씨 또한 몇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권은 초나라의 일을 논한 것으로 가장 공교하고 묘하게 썼다. 내가 이를 좋아하므로 우둔한 생각을 다하여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려고 하나 선현의 저작에 끼어들기가 부족하여 부끄럽고, 단지 여기에 옛사람이 쓴 형상이 보존하길 바랄뿐이다. 옛날에 별도의 명칭이 없어 이를 ‘자세(字勢)’라고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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