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예자료실/서론자료

[스크랩] 사체서세 (위항) 2

by 혜당이민지 2010. 2. 19.

 

   自黃帝至三代, 其文不改. 及秦用篆書, 焚燒先典, 而古文絶矣. 漢武時, 魯恭王壞孔子宅, 得尙書春秋論語孝經. 時人已不復知有古文, 謂之科斗書. 漢世秘藏, 希得見之. 魏初傳古文者, 出於邯鄲淳. 恒祖敬侯寫淳尙書, 後以示淳, 而淳不別. 至正始中, 立三字石經, 轉失淳法, 因科斗之名, 遂效其形. 太康元年, 汲縣人盜發魏襄王, 得策書十餘萬言. 案敬侯所書, 猶有髣髴. 古書亦有數種, 其一卷論楚事者最爲工妙, 恒竊悅之, 故竭愚思, 以贊其美, 愧不足前賢之作, 冀以存古人之象焉. 古無別名, 謂之字勢云.

 

   황제시대부터 삼대에 이르기까지 글자의 형체는 바뀌지 않았다. 진나라에 이르러 전서를 사용했고 이전의 전적을 불태워서 고문은 끊어지게 되었다. 한 무제 때 노공왕은 공자의 집을 허물어서 『상서』ㆍ『춘추』ㆍ『논어』ㆍ『효경』을 얻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고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여, 이를 ‘과두서’라고 일컬었다. 한나라 때 비장한 전적에 드물게 보였다.

   위나라 초에 고문을 전한 것은 감단순(邯鄲淳)에게서 나왔다. 위항의 조부인 위기(衛覬, 敬侯)는 감단순의 서체로 『상서』를 쓴 뒤, 감단순에게 보였으나 감단순은 구별하지 못하였다. 정시(正始, 240-249) 연간에 이르러 <삼자석경>을 세웠는데 오히려 감단순의 필법을 상실했으나, ‘과두서’라는 이름 때문에 드디어 그 형태를 본받게 되었다.

   태강원년(太康元年, 280)에 급현사람이 위양왕의 무덤을 도굴하여 간책에 쓰인 글 십여만 글자를 얻었다. 위기가 쓴 것을 참조해보니 오히려 비슷함이 있었다. 옛날 글씨 또한 몇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권은 초나라의 일을 논한 것으로 가장 공교하고 묘하게 썼다. 내가 이를 좋아하므로 우둔한 생각을 다하여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려고 하나 선현의 저작에 끼어들기가 부족하여 부끄럽고, 단지 여기에 옛사람이 쓴 형상이 보존하길 바랄뿐이다. 옛날에 별도의 명칭이 없어 이를 ‘자세(字勢)’라고 일컫는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심제 김보경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