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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자료실/서론자료

[스크랩] 설문해자서 (허신) 3

by 혜당이민지 2010. 2. 19.

 

 

漢興有草書. 尉律, 學童十七已上始試, 諷籒書九千字乃得爲吏, 又以八體試之. 郡移太史幷課, 最者以爲尙書史. 書或不正, 輒擧劾之. 今雖有尉律, 不課, 小學不修, 莫達其說久矣. 孝宣皇帝時, 召通倉頡讀者, 張敞從受之, 涼州刺史杜業, 沛人爰禮, 講學大夫秦近, 亦能言之. 孝平皇帝時, 徵禮等百餘人令說文字未央廷中, 以禮爲小學元士, 黃門侍郞揚雄采以作訓纂篇. 凡倉頡以下十四篇, 凡五千三百四十字, 群書所載, 略存之矣. 及亡新居攝, 使大司空甄豊等校文書之部. 自以爲應制作, 頗改定古文. 時有六書, 一曰古文, 孔子壁中書也, 二曰奇字, 卽古文而異者也, 三曰篆書, 卽小篆, 秦始皇帝使下杜人程邈所作也, 四曰左書, 卽秦隸書, 五曰繆篆, 所以摹印也, 六曰鳥蟲書, 所以書幡信也.


한나라가 흥함에 초서가 있었다. 정위(廷尉)의 법률규정에 학동이 17세에 이상이면 비로소 시험을 보는데 주문(籒文) 9천자를 외워야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또한 팔체로 시험을 보았다. 고을에서 추천을 받아 태사가 주관하는 회시를 보러 이송하였으며,  가장 뛰어난 자를 상서사로 삼았다. 글씨가 혹 바르지 않으면 문득 들어 탄핵했다. 지금 비록 정위의 법률규정이 있지만 시험을 보지 않고, 소학을 수업하지 않아 그 말을 통달하지 않음이 오래 되었다.

선제 때 『창힐편』을 통독할 수 있는 사람을 부름에 장창에게 전수받은 양주자사 두업(杜業), 패현(沛縣) 사람인 원예(爰禮), 강학대부인 진근(秦近) 이 또한 이를 말할 수 있었다. 평제 때 원예 등 100여 명을 징빙하여 미앙정에서 문자를 말하도록 하여 원예를 소학원사로 삼고, 황문시랑인 양웅은 이를 채집하여 『훈찬편』을 지었다. 무릇 『창힐편』 이하 14편은 모두 5,340자로 모든 글에 실린 것들이 대략 여기에 보존되었다. 망한 신나라의 왕망이 섭정함에 이르러 대사공인 견풍(甄豊) 등으로 하여금 문서의 분류를 교정하도록 했다. 견풍은 스스로 황제의 명에 응해 제작하는 것이라 여겨 자못 고문을 개정했다. 당시에 육서가 있었는데 첫째, 고문(古文)으로 공자의 벽에서 나온 글씨를 말한다. 둘째, 기자(奇字)로 즉 고문이지만 다른 것을 말한다. 셋째, 전서(篆書)로 즉 소전이니 진시황제가 하두(下杜) 사람인 정막으로 하여금 만든 것을 말한다. 넷째, 좌서(左書)로 진나라의 예서를 말한다. 다섯째, 무전(繆篆)으로 인장을 모각할 때 사용한 글자체를 말한다. 여섯째, 조충서(鳥蟲書)로 기치(旗幟)와 부절(符節)에 썼던 글자체를 말한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심제 김보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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