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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고전의 향기036 사기 술잔

by 혜당이민지 2009. 4. 13.

고전의 향기036    

사기 술잔

아홉 해 전에 한 친구가 사기로 만든 작은 술잔 하나를 선물하였다. 나는 그 술잔을 사랑하고 아껴서 늘 책상 위에 놓아두고 술을 따라 마셨다. 서울로 거처를 옮길 때 그 술잔을 가져가지 않고 고향집에 남겨두면서 깨뜨리지 말라고 맏아들에게 신신당부하였다. 그 뒤 맏아들이 찾아왔을 때 혹시라도 술잔을 깨뜨렸는지 물었더니 “벌써 깨졌는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아 깨뜨린 것이 틀림없다.

언젠가 관동(館洞) 사는 친구 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반짝이고 깨끗한 사기 술잔이 눈에 뜨였다. 술에 취한 틈을 엿보다가 빼앗아 가지고 소매에 넣어 왔다. 집안 사람에게 부탁하여 술을 마실 때는 언제나 그 술잔에 따라 마시도록 준비하라고 일렀다. 그런데 계집종이 조심하지 않아서 또 깨뜨리고 말았다. 아무리 탄식한들 소용이 없는 일이라 또 그런 술잔을 장만할 생각이었다.

이해 봄 다시 서울에 갔을 때 다른 계집종이 사기 술잔을 바쳤다. 예전에 깨진 술잔에 견주어 보니 몸집이 조금 컸다. 나는 몹시 애지중지하면서 또 깨질까 염려하여 계집종의 손에 닿지 않도록 하였다. 술을 따라 마실 때에는 내가 직접 따라 마셨고, 술을 마신 뒤에는 바로 책상머리에 놓아두었다. 지금껏 깨지지 않았으니 퍽이나 다행스럽다.

사기 술잔은 광주(廣州)에서 만든 것을 제일로 친다. 이 술잔도 광주에서 나온 것으로 그 생김새는 똑바르고 그 빛깔은 정결하여 정말이지 술을 마시는 사람에 딱 어울린다. 허나 사기 술잔은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 오래도록 온전하게 지니기가 어렵다. 오늘은 비록 온전하다고 해도 내일 깨지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이번 달에는 비록 온전하다고 해도 다음 달에 깨지지 않을지는 역시나 알 수 없다.

유기(鍮器) 술잔은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유기 술잔은 술맛이 변하지만 사기 술잔은 술맛이 변하지 않는다. 내가 사기 술잔을 꼭 가지려 하는 동기가 참으로 여기에 있다.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친구들을 내 집에 모이게 하여 이 술잔으로 함께 술을 마셨다. 술맛이 기가 막힌 것은 이 술잔이 있어서다. 감히 아끼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 김득신(金得臣), 〈사배설(沙杯說)〉, 《백곡집(柏谷集)》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104집 《백곡집(柏谷集)》6권 설(說)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해설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17세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장가이다. 관찰사를 지낸 김치(金緻)의 아들로서 천재형 문인이기보다는 노력형 문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 점을 보여주듯이 나이 59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급제한 이후에도 큰 벼슬을 하지 않은 채 주로 창작에 몰두하며 삶을 영위하였다. 서울과 충청도 괴산에 집이 있어 두 곳을 오가며 생활하였다.

선비의 일화를 묘사한 저작물들에서는 그를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으로 많이 묘사하고 있다. 그런 묘사가 그릇된 것은 아니나, 그의 인생을 잘 들여다보면 아주 소탈하고도 인정이 넘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진흙으로 구워 만든 사기 술잔을 소재로 쓴 이 글에서도 그런 모습이 드러난다.

우연히 사기 술잔을 얻은 뒤로 그는 늘 이 잔에만 즐겨 술을 따라 마신다. 그런데 이 술잔은 깨지기 쉬운 약점이 있다. 자신은 몹시도 조심하고 아끼건마는 집의 자식들이나 종들은 그의 기호나 조심성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 차례 깨지고 다시 장만하는 과정과 그에 관한 소감을 밝힌 것이 글의 내용이다.

이 글의 특징은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난 작은 에피소드를 기록한 데 있다. 그렇게까지 귀하다고 할 수 없는 소박한 물건을 사랑하는 개인의 독특하면서도 인간적인 취향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특히나 사기 술잔을 좋아한 나머지 남의 집에서 취중을 틈타 친구로부터 사기 술잔을 빼앗아 오는 모습에서는 인간적 체취를 엿볼 수 있다. 사기 술잔의 미덕을 예찬한 대목이나 생일날 벗들을 모아 그 술잔으로 술을 마시는 유쾌함을 묘사한 대목은 아주 인상적이다. 개성과 삶을 정제하여 표현한 짧은 이 글은 아름다운 한 편의 수필이다.

 

   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