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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38. -외삼촌이 써서 주신 효경

by 혜당이민지 2009. 6. 27.

고전의 향기038      

외삼촌이 써서 주신 효경

어렸을 적에 나는 어머니를 따라 외할머니를 찾아뵈었다. 그 때 외숙(外叔) 죽하공(竹下公)께서는 글씨에 힘을 기울이면서 덕을 닦고 계셨는데 특히 부모님께 효도를 다 하셨다. 산자락을 사이에 두고 분가(分家)하여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외할머니를 살피러 오셨다. 얼굴에는 기쁜 빛을 띠고 상냥한 말씨를 써서 외할머니가 웃고 즐기시기에 보탬이 될 만한 기이하고 재미있는 바깥 세상일을 얻어 와서 하나하나 말씀을 해 올렸다. 외숙의 말씀을 듣고서는 온 집안이 일제히 왁자하게 웃음보가 터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어리석고 바보스럽기 짝이 없는 때라, 외숙이 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그 곁에 바짝 붙어 앉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외숙은 내 팔을 끌어다가 글자를 가르쳐 주고 읽어보라 하고, 제법 읽을 때에는 “기이한 재주다.”라고 칭찬하셨다. 또 종이와 붓을 주면서 글자를 쓰게 하고, 제법 잘 쓸 때에는 “이 글씨는 우리 집안 글씨체다. 옛날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내 외손자 가운데 분명히 글씨를 잘 쓰는 아이가 있을 게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너인가 보구나!”라고 기뻐하셨다.

그 뒤 언젠가 외숙께서는 앞으로 오라고 나를 불러서 무릎을 꿇어 앉으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종이조각을 꺼내어 줄 듯하다가 다시 넣으시면서 “이것은 글을 짓는 도구이니, 이걸 얻으려면 절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내가 일어나서 절을 하자 그제야 웃으시면서 주셨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서산(書算)이었다. 종이에 구멍을 뚫어 혀를 만들고 그 혀를 열고 닫아서 책을 읽은 수효를 기록하는 물건이다. 이 서산은 외숙께서 직접 뚫어 만드신 것이었다. 나는 정말 기뻐서 그 날은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


◀◁ 서산_조선(19세기)_호림박물관소장


다음날 아침 외숙께서 내게 오셔서 “네가 몇 번이나 읽었는지 서산으로 세어 봤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외숙은 웃으시면서 “거짓으로 셈했구나!”라고 하셨다. 부끄럽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여 나는 곧 울음보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자 외숙께서는 나를 달래서 마음을 풀어주셨다.

모두가 어린 나의 손을 잡아 이끌어 공부에 나아가도록 하려는 의도였지 장난하고 놀리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일로 해서 외가에 한 해를 머물면서 문예를 조금 익혔고, 어른들께서는 어린 나이에 많이 성장했다고 칭찬해주셨다.

내가 친가로 돌아올 때 외숙께서는 《효경(孝經)》 한 부(部)를 직접 쓰셔서 내게 주셨다. 외할아버지의 글씨체를 본받아서 글씨를 썼기에 글자가 제법 커서 분간하여 익히기가 수월하였다. 나는 책을 받아서 보물인 양 간직하고 때때로 붓에 먹물을 묻혀 그 글씨를 흉내 내어 익혔다. 글자와 줄 사이에 먹물 자국으로 더럽혀진 것은 내가 어릴 때 남겨놓은 흔적이다.

외숙은 친구분들과 시를 짓는 모임을 즐기셨는데 그 자리에 나는 많이 따라갔다. 언젠가 외숙께서 술이 불콰하실 때 여러 편의 시를 지어 내게 보내주셨다.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일과 경계삼아야 할 일을 말씀하신 시였다. 나는 그 시를 《효경》과 함께 보관해두었다.

아! 이제 나도 머리털이 듬성듬성해지고 문예는 보잘 것 없고, 학업은 이룬 것이 없다. 그리고 외숙의 가르침도 다시는 받을 길이 없다. 화로가나 등불 곁에서 어머니를 마주하고 앉아 외숙에 대해 말씀을 나눌 때에는 언제나 그저 눈자위에 눈물만을 흘릴 뿐이다.

올 가을에 처마 밑에서 햇볕을 받으며 책을 말렸다. 그러다가 외숙께서 쓰신 《효경》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저미도록 아파오며 지난 일들이 마치 어젯일처럼 떠올랐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외숙께서는 몸소 효도를 실천하심으로써 자식들이나 조카들을 이끌려고 하셨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일부러 《효경》을 내게 주셔서 기예를 학문보다 앞세워서는 안 되고, 학문을 행실보다 앞세워서는 안 되며, 어떤 행실도 효도보다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거로구나!

아! 세상에는 외숙의 문장과 재능을 잘 아는 분들은 있지마는 이렇게 지고한 행실이 있음은 그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나는 옛일을 갖추어 쓰거니와, 그저 내 손을 붙잡아 가르쳐주신 데 감사하는 뜻만을 표현할 뿐이랴? 나를 아껴주신 분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서문(西門)의 슬픔_1)도 아울러 드러내고자 한다.

1) 자신을 아껴 주던 인물이 죽은 뒤 그를 향한 지극한 슬픔을 표현하는 말이다. 중국 진(晉) 나라 양담(羊曇)이 서주(西州)의 성문을 지나면서 그를 아껴주었던 외숙 사안(謝安)을 생각하며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는 옛일에서 나온 고사이다. “양담은 태산(太山) 사람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선비이다. 그는 사안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는데 사안이 죽은 뒤에는 해를 넘겨 음악을 하지 않았고, 서주(西州)로 통하는 길로는 가지를 않았다. 언젠가 술에 크게 취하여 길에서 부축을 받고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도 모르는 새 서주의 성문에 이르렀다. 좌우에 있던 이들이 ‘여기가 서주의 성문입니다’라고 아뢰자 양담은 몹시 슬퍼하고 통곡하고서 떠났다.”(《진서(晉書)》〈사안전(謝安傳)〉)

- 이형부(李馨溥), 〈구씨수서효경서(舅氏手書孝經序)〉, 《계서고(溪墅稿)》

해설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의 저자인 이규상(李奎象)의 손자 이원순(李源順)은 서예로 유명한 김상숙(金相肅)의 딸과 혼인하여 이형부(李馨溥, 1791~?)를 낳았다. 맏아들인 이형부는 두 집안의 학문적 명성을 이어받았으나 53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난 뒤 이렇다 할 큰 벼슬을 역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집안의 문한(文翰)을 이어받아 《계서고(溪墅稿)》란 흥미로운 내용의 문집을 남겼다.

이 책에는 그가 어린 시절 외가에서 보낸 때의 일을 감회 어리게 추억하는 사연의 글이 실려 있다. 외가에서 외숙으로부터 공부하고 서책을 선물로 받은 사연이 그 줄거리를 이룬다. 글의 배경에는 외할아버지 김상숙(1717∼1792)이 등장하는데 그는 호를 배와(배[土+丕]窩)라고 하는 저명한 서예가이고, 외숙 역시 글씨를 잘 쓴 저명한 문인 김기서(金箕書, 1766~1822)이다. 이형부의 할아버지인 이장재(李長載)는 친구이자 사돈인 김상숙과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서 김상숙의 글씨를 몹시 칭찬한 일이 있다. 이 집안에서 보관한 김상숙의 필첩이 지금도 남아 있다. 글씨는 두 집안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매개물이다.

지은이가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어느 가을날 책을 햇볕에 말리다가 우연히 찾게 된 필사본 《효경》 때문이다. 외가를 떠나 친가로 가는 그에게 외숙께서 글씨 연습하라고 직접 써서 주신 선물이었다. 정성과 사랑을 담아 친필로 써 주신 그 책을 보노라니, 어린 시절의 한 때 외숙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되살아난다.

외가에 있을 때 그는 몹시 외숙을 따랐다. 외숙은 날마다 외할머니를 찾아와 재미있는 이야기로 온 집안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하고, 자기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조카를 놀리면서 글씨를 가르쳐 주고, 조금만 잘해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외가는 글씨를 잘 쓰는 집안이었다. 글씨 쓴 것을 보고서는 명필인 외할아버지의 솜씨가 보인다면서 어린 조카를 격려하였다. 그런 말씀 하나 하나가 추억 속에 남아 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대목은 외숙이 언젠가 책을 읽은 수효를 세는 서산을 직접 만들어 선물한 장면이다. 이 대목의 묘사는 너무도 선연하여 직접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제는 수십 년이 흘러 외숙은 이미 고인이 되셨고, 자신은 머리가 듬성듬성해질 정도로 나이가 들었다. 외숙을 비롯한 집안 어른의 기대를 받던 아이는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들었다. 집안 어딘가에 숨어있듯이 남아있는 옛 책들에는 가끔 이러한 소중하고 애틋한 사연들이 묻어나온다.

 

   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