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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고전의 향기037 소금장수의 백상루 구경

by 혜당이민지 2009. 4. 13.

고전의 향기037  

소금장수의 백상루 구경

안주(安州) 백상루(百祥樓)는 빼어난 풍경을 지닌 관서 지방의 누각이다. 중국 사신이 오거나 우리나라 사람이 공무로 지나가게 되면, 누구든지 이 누각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덕수(德水) 이자민(李子敏, 이안눌)이 “수많은 산들이 바다에 이르러 대지의 형세는 끝이 나고, 꽃다운 풀밭이 하늘까지 이어져 봄기운은 떠오른다.”라고 시로 읊은 곳도 바로 이곳이다.

어떤 상인이 소금을 싣고 가다가 이 누각을 지나게 되었다. 때는 겨울철로 아침 해가 아직 떠오르기 전이었다. 상인은 누각 아래 말을 세워 놓고 백상루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그저 보이는 것이라곤 긴 강에 깔린 얼음장과 넓은 들을 뒤덮은 눈뿐이었다. 구슬픈 바람은 휙휙 몰아오고, 찬 기운은 뼈를 에일 듯 오싹해서 잠시도 머물 수 없었다. 그러자 상인은 “도대체 백상루가 아름답다고 한 게 누구야?”라고 탄식하며 서둘러 짐을 꾸려서 자리를 떴다.


◀◁ 안주 백상루

저 백상루는 참으로 아름다운 누각이다. 하지만 이 상인은 알맞은 철에 놀러 오지 않았으므로 그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듯이 모든 사물에는 제각기 알맞은 때가 있으며, 만약에 알맞은 때를 만나지 않는다면, 저 백상루의 경우와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여우 겨드랑이 털로 만든 가죽옷은 천하의 귀한 물건이지만 무더운 5월에 그것을 펼쳐 입는다면 가난한 자의 행색이 되며, 팔진미(八珍味)가 제 아무리 맛이 좋은 음식일지라도 한여름에 더위 먹은 사람을 구하지는 못한다. 황금과 구슬, 진주와 비취는 세상 사람들이 보석이라고 일컫는 물건이지만, 돌보지 않아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방안에서 그런 황금과 옥으로 치장을 하고 앉아 있다면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농사짓는 집의 여인이 짧은 적삼에 베치마를 입었으면서 그 위에 구슬과 비취로 만든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면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명성과 좋은 관직은 세상 사람들이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얻을 만한 때 얻는다면 좋은 것이겠지만 얻을 만한 때가 아닌 때에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전한(前漢)의 세상에서는 유협(遊俠)을 숭상하였고, 전국시대의 경춘(景春)은 장의(張儀)와 공손연(公孫衍)을 대장부로 간주하였다._1) 그들의 명성도 명성이라 할 수는 있지만 그 때는 다름 아닌 한나라가 쇠퇴한 때요 전국(戰國)시대였다. 송(宋)나라 소흥(紹興) 시절에는 금(金)나라와 강화를 맺자는 주장에 찬동하는 자들이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고, 경원(慶元) 연간에는 주자(朱子)를 그릇된 학문이라고 공격하는 자들이 요직에 두루 포진해 있었다. 그런 자리가 좋은 자리이기는 하지만 그 때는 바로 진회(秦檜)와 한탁주(韓탁胄)가 행세하던 시기였다._2) 저들은 자신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군자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썩은 쥐보다도 못하여 병든 올빼미가 한 번 놀랄 거리도 되지 못한다._3)

무릇 이러한 것들이 다 겨울에 백상루를 구경한 소금장수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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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의와 공손연은 모두 전국시대의 종횡가(縱橫家)이다. 《맹자(孟子)》 〈등문공하〉에서 경춘이 그들에 대해 말하기를, “공손연과 장의가 어찌 진정한 대장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한 번 화를 내자 제후들이 두려움에 떨었고, 편안하게 지내자 천하가 전쟁을 멈추었습니다.” 하였다.

2) 진회는 금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였고, 한탁주는 주희(朱熹)를 내쫓고 성리학을 위학(僞學)으로 몰아 경원당화(慶元黨禍)를 일으켰다. 이 두 사람은 송나라의 대표적 간신으로 평가받는다.

3)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혜자(惠子)가 양(梁)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혜자에게, “장자(莊子)가 와서 당신을 대신하여 재상이 되려고 한다”고 말했다. 혜자가 몹시 두려워하여 전국에 수배하여 사흘 밤낮을 장자를 찾았다. 장자가 스스로 혜자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남방에 원추란 새가 있는데 자네는 아는가? 원추는 남쪽 바다를 출발하여 북쪽 바다로 날아갈 때 오동나무가 아니면 쉬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물이 나는 샘이 아니면 마시지 않았네. 그런데 올빼미가 썩은 쥐를 얻고서 원추를 쳐다보면서 쥐를 뺏길까 봐 ‘꿱’ 하고 을러댔다네. 그처럼 자네도 양나라 재상 자리 때문에 나를 을러대는 것이 아닌가?”

- 권득기(權得己), 〈만회집(晩悔集)〉, 《염상유백상루설(鹽商遊百祥樓說)》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76집 《만회집(晩悔集)》 만회집습유(晩悔集拾遺)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해설


권득기(權得己, 1570~1622)의 작품이다. 그는 선조 광해군 연간의 선비이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수재로서 40대에 광해군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정계를 떠나 아예 야인으로 살다 53세에 죽었다. 세상에는 그 자신보다 아들인 탄옹(炭翁) 권시(權시[言+思])가 널리 알려졌다.

포저(浦渚) 조익(趙翼, 1579~1655)이 쓴 그의 묘지명에서, 몸을 깨끗이 지키려는 의지를 갖고 벼슬에 급급해하지 않는 광해군 시대의 사대부로는 권득기와 임숙영(任叔英)이 제일이라고 하였다. 포저는 권득기가 광해군의 실정에 실망하여 향촌에 물러가 살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이후에는 집안의 혼사에도 잘 참여하지 않았으며, 급한 일이 아니면 서울에도 출입하지 않을 만큼 결벽의 자세를 유지한 지사라고 평가했다. 이 글을 보면, 그러한 저자의 인생관이 투영되어 있다.

안주의 백상루는 전국의 이름난 누정 가운데서도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명승지라도 혹한이 찾아온 겨울철, 아무도 없는 아침에 올라가 보면, 아름답기는커녕 그 매서운 추위에 서둘러 자리를 뜨고 싶어진다. 알맞은 때가 아니면 제 아무리 좋은 풍경이라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고의 옷과 음식도 제 때가 아니면 좋다고 할 수 없고, 아무리 고귀한 보석도 제 자리가 아니면 귀하지 않다.

그렇다면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명예나 권력은 어떠한가? 저자는 명예나 권력도 누구나 얻고 싶어하지만 그것조차도 얻어야 할 때와 올바른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마치 저 소금장수가 백상루에 올라가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명예와 권력을 얻은 때가 횡포와 독재가 횡행하는 추악한 시기이거나 얻은 방법이 올바르지 않을 때 그 명예와 권력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추한 것이다.

예로부터 선비에게는 출처(出處)가 중요한 인생의 문제였다. 이 글은 그러한 출처와 인생의 진로문제를 다뤘다. 하지만 이 문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