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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고전의 향기033 사통(沙筒)을 빚고서

by 혜당이민지 2008. 11. 6.

고전의 향기033        

사통(沙筒)을 빚고서

나는 우연히 이종사촌 동생 임도언(任道彦)을 데리고 도자기 굽는 일을 감독하는 이종사촌 동생 조예경(曹禮卿)을 찾아갔다. 막 자기를 굽는 일을 하던 중이라 모래흙을 골라내는 사람이 있었고, 진흙을 반죽하여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고, 그릇을 가는 사람과 깎는 사람이 있었고, 그릇을 늘어놓고 햇볕에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과 주위에 보이는 것 모두가 그 일이었다.

조금 있자니 새로이 자기를 구워서 앞에 벌려놓았다. 생활에서 사용하는 갖가지 그릇들이 다 있었다. 그 가운데 붓을 담는 필통과 벼루에 쓰는 연적, 술 마시는 술병과 술잔은 하나같이 문방(文房)에서 요긴하게 쓰는 물건이다. 그 색깔을 살펴보니 옥인양 눈인양 희디희어서 눈이 부셨다. 진흙에서 이러한 빛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가 정말 어려웠다.

나는 옥과 같으면서도 옥처럼 사치스럽지 않은 자기가 정말 사랑스러웠다. 문방에 놓아두면 맑은 아취(雅趣)를 더하고, 초가집에 놓아두어도 주제넘은 꼴이 되지 않을 듯하여, 비록 내가 얻어간다 해도 곤궁한 내 처지에도 어울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 가지 모양을 구상하여 조예경에게 그 모양대로 빚어 달라고 청을 넣었다. 그 자기의 이름을 사통(沙筒)이라 했다.

이 사통은 대개 원미지와 백낙천이 사용한 시통(詩筒)¹을 본떠서 만들었다. 백낙천과 원미지는 시를 먼 곳에 전하기 위해 시통을 사용하였는데, 대나무로 통을 만들어 오고가는 길에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 크기가 클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만든 사통은 한 곳에 놓아두기만 할 뿐 들고 다니며 쓸 일이 없다. 시문(詩文)이나 간찰을 얻으면 모두 사통 속에 넣어 둬서 안 될 게 없다. 날마다 문장과 서화를 마주하는지라, 보고 난 것을 저 사통에 보관하자면 크기가 작아서는 안 될 일이다. 드디어 원미지와 백거이의 시통 모양을 취하되 몸집을 크게 만들었다.

사통은 성질은 따사로우면서도 부드럽고, 색깔은 반짝이면서도 깨끗한 것이 장점이다. 무늬를 아로새기고 조탁한 기교를 쓰지도 않았고, 또 편안하고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서는 물건을 많이도 받아들인다. 그 점이 군자의 덕과 너무도 비슷하다.

내가 그 물건을 아끼는 이유가 단적으로 여기에 있다. 두 아우도 모두 “이 물건은 형님만 아끼는 것이 아니라 아우들도 아낀답니다.”라고 하였다. 조예경이 장인(匠人)에게 분부하여 직접 사통 세 개를 만들게 하여 각자 하나씩 가지자고 하였다. 내게는 그 사연을 글로 쓰게 하고 도언에게는 사통의 표면에 글씨를 쓰게 하였다. 훗날 이 사통을 보는 자손들이 이 물건이 우리 세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진 유래를 잘 알기 바라는 심정이다.


◁◀ 조선후기민화 중 문방도_부분

- 홍태유(洪泰猷), 〈제사통(題沙筒)〉, 《내재집(耐齋集)》

1) 시통은 시고를 넣어서 먼 곳에 편리하게 보내기 위해 만든 대나무 통이다. 백거이(白居易)가 항주(杭州)에 있을 때 친구인 원미지와 시를 주고받기 위해 이 시통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187집 《내재집(耐齋集)》4권 제후(題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해설


홍태유(洪泰猷, 1672~1715)가 쓴 글이다. 저자는 효종의 부마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당파 싸움에서 화를 입어 죽임을 당했고, 본인은 전 인생을 주로 경기도 여주에서 야인으로 살았다. 그런 그가 자기를 굽는 사옹원 분원에서 근무하던 사촌 조예경(曹禮卿, 이름 미상)을 임도언(任道彦, 任適)과 함께 찾아갔다. 거기에서 다양한 자기를 구워내는 현장을 구경하고 나서 글을 쓰는 문인에게 꼭 필요한 필통(筆筒)을 만들어 갖기로 하였다.

그에게는 모래흙을 구워 만드는 자기는 흙에서 나왔지만 흙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은 신비한 물건이었다. 그가 필통에 사통(沙筒)이란 이름을 부여한 것은 모래흙에서 나온 물건임을 밝히고 싶어서였다. 필통의 모습은 “문방에 놓아두면 맑은 아취를 더하고, 초가집에 놓아두어도 주제넘은 꼴이 되지 않을 만큼” 수수하다. 궁하게 사는 자기에게 어울릴 것만 같은 물건이므로 이 기회에 만들어 갖고 싶었다. 그래서 요청을 하여 만들어놓으면 묵직하고 편안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이것저것 많은 물건을 넉넉하게 많이 받아들일 것이 분명하다. 이 수수한 자기는 군자가 가져야 할 덕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좋은 사통을 셋이서 함께 만들기로 하고, 이러한 내용을 아예 자기에 새기기로 하였다. 저자는 글을 쓰고, 임도언은 글씨를 쓰며, 조예경은 그릇을 만들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사연을 적어 구운 세 개의 자기를 만들어 하나씩 가진다면, 사촌들끼리 만난 이 날의 만남을 기념하는 좋은 기념품이 될 것이고, 후손들이 이런 사연을 기억하는데도 안성맞춤이 될 것이다. 수수한 필통 자기를 만드는 것 하나에도 멋과 추억을 담으려는 옛 선비의 삶을 엿볼 수 있다.

 

   필자 : 안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