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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011 이상한 관상쟁이

by 혜당이민지 2008. 5. 27.

고전의 향기011         (2008. 5. 26. 월)

이상한 관상쟁이

1.

관상쟁이 한 사람이 나타났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관상책을 보지도 않고, 관상법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특이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관상을 봐주었다. 그래서 ‘이상한 관상쟁이’라 불렸다. 귀족들과 높은 벼슬아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남에게 뒤질세라 앞다퉈 맞아들이거나 경쟁하듯 찾아가서 자기의 관상을 봐달라고 청하느라 법석이었다.

그런데 관상쟁이는 부귀하여 살집도 좋고 기름기가 낀 사람의 관상을 보고서는 “당신의 모습은 비쩍 말랐소. 당신처럼 천한 족속은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빈천하여 비쩍 마르고 허약한 사람의 관상을 보고서는 “당신의 모습은 살졌소. 당신처럼 귀한 족속은 드물 것이오!” 라고 말하였다.
장님의 관상을 보고서는 “눈이 밝다!”고 하고, 민첩하여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의 관상을 보고서는 “절름발이라 걸음을 걷지 못할 상이오!”라고 하고, 얼굴이 아주 예쁜 부인의 관상을 보고서는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 상이오!”라고 하였다.
너그럽고도 인자하다고 세상에서 좋게 말하는 사람의 관상을 보고서는 “만인을 슬프게 할 사람이오!”라고 하고, 당시 사람들이 몹시 잔혹하다고 일컫는 자의 관상을 보고서는 “만인의 마음을 기쁘게 할 사람이오!”라고 하였다. 그가 본 관상은 모두 이런 식이었다.

게다가 재앙과 복이 어디서 올 것인지를 말해주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의 용모와 동정을 살피는 것도 모두 반대로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들어대며 그를 사기꾼으로 몰아 잡아다가 족쳐서 그 사기행각을 다스리려 들었다. 그러나 나만은 그들을 말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말이란 처음에는 거슬리지만 뒤에는 순순한 것이 있고, 겉보기에는 천근한 듯하지만 속으로는 심원(深遠)한 것이 있지. 저 관상쟁이도 눈이 있는데, 까닭없이 살찐 사람과 비쩍 마른 사람, 눈먼 사람임을 몰라서 살찐 사람을 비쩍 말랐다고 하고, 비쩍 마른 사람을 살졌다고 하며, 눈먼 사람을 눈 밝은 사람이라 하겠는가? 이 사람은 특별한 관상쟁이가 분명하네.”

◀◁ 웃는 표정 - 하회탈(양반/부네)

2.

그리고는 목욕하고 양치질을 한 다음 옷깃을 바로잡고 단추를 잠그고서 관상쟁이가 사는 곳을 찾아가, 곁에 있던 사람들을 물리치고서 물었다.

“당신이 아무개 아무개의 관상을 보고서 이러저러하다고 말했다던데 그 이유가 무엇이요?”

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무릇 사람은 부귀해지면 교만하고 남을 능멸하는 마음이 자라납니다. 죄가 가득 차면 하늘은 반드시 엎어버리기 때문에 곧 쌀겨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때가 닥칠 것이므로 비쩍 말랐다고 한 것이고, 곧 쫓겨나 비천한 사내가 될 것이므로 당신은 천한 족속이라고 한 것이지요.
또 사람이 빈천해지면 뜻을 굽히고 자신을 낮추어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막힌 운수가 극에 달하면 터진 운수가 반드시 돌아오는 법이므로 부자가 될 조짐이 벌써 이르렀기 때문에 살졌다고 한 것이고, 곧 만 섬의 곡식을 거두고 수레 열 대를 모는 부귀를 누릴 것이므로 당신은 귀한 족속이라고 한 것이지요.
고운 자태와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 건드리고 싶게 하고, 진기한 물건과 기호품을 보면 갖고 싶게 하여, 사람을 미혹에 빠트리고 부정한 짓으로 유도하는 것이 바로 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헤아릴 수 없이 커다란 욕을 당하게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자는 눈이 밝지 못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장님만이 마음이 깨끗하여 욕심도 없고 욕망도 없기 때문에 몸을 보전하고 욕됨을 멀리하는 것이니, 어진 사람이나 깨달은 사람보다도 낫습니다. 그래서 눈이 밝은 사람이라고 한 것이지요.
민첩하면 용맹함을 숭상하고 용맹하면 평범한 사람을 깔보기가 쉽지만 이런 사람은 끝내 자객이 되거나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기 일쑤입니다. 법관이 그를 잡아 가두고 옥졸이 지키는 신세가 된다면 발에는 차꼬가 채워지고 목에는 큰칼이 씌워질 텐데 제 아무리 재빨리 달려 도망치려한들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절름발이라 걸음을 걷지 못할 상이라 한 것이지요.
저 아름다운 용모는 음란하고 사치스런 자가 보면 고귀한 구슬처럼 빼어나게 보이지만, 정직하고 순박한 사람이 보게 되면 진흙덩이처럼 추하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 상이라고 한 것이지요.
저 어질다고 일컬어지는 분은 죽을 때 곳곳에서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서 그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줄줄 흘려서 마치 어머니를 여읜 어린애처럼 슬퍼합니다. 그래서 만인을 슬프게 할 사람이라고 한 것이지요.
몹시 잔혹하다고 일컬어지는 자의 경우 그가 죽으면 거리마다 노래를 부르고 골목마다 화답하며 양고기와 술로 서로 축하하면서 웃느라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손바닥이 터져라 손뼉을 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만인의 마음을 기쁘게 할 사람이라고 한 것이지요.”

나는 깜짝 놀라서 일어서며 말했다.

“과연 내 말대로 이 사람은 정말 특별한 관상쟁이로구나. 그가 한 말은 좌우명을 삼아도 좋고 인생의 지침으로 삼아도 좋겠다. 이런 사람을 어찌 낯빛이나 살피고 생김새로 판단하여 귀티가 나는 자는 거북 무늬가 있네 물소의 뿔처럼 생겼네 하며 치켜세우고_1), 흉해 보이는 자는 말벌의 눈깔이니 승냥이 목소리니 하며, 곡해를 일삼고 뻔한 상식만 늘어놓는 짓거리나 하며 저 혼자 신통하고 저만이 영험하다 떠벌리는 자와 견주겠는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와 그와 주고받은 말을 적는다.


- 이규보(李奎報), 〈이상자대(異相者對)〉,《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동국이상국집》 20권 〈雜著○韻語〉나, 고전번역서 《동문선》 105권 대(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후한(後漢) 시대의 이고(李固)는 기이한 용모를 가져 정수리가 물소뿔처럼 튀어나왔고 발바닥에는 거북이 무늬가 있었다고 한다. 귀인의 관상을 말한다.

해설


고려 고종 때의 문인인 이규보(1168~1241)가 쓴 글이다.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려 있고, 이후 《동문선》,《동문수》와 같은 문장 선집에 실려 널리 알려졌다.

어느 날 사람들 사이에 나타난 이상한 관상쟁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소동이 이 글의 배경이다. 8백년 전 사람들도 관상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만하다.

관상을 보는 행위는 낡은 미신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는 현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욱이 사람을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 나아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기에 이 글은 흥미를 더한다. 상식과 통념을 통쾌하게 깨트리기를 좋아하는 이규보 특유의 산문 정신이 살아있는 글이다.

관상은 사람의 생김새를 보고 그의 인생과 미래를 판단하는 술수이다. 생김새와 하는 짓을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밖에 없고,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예측할 수밖에 없다. 일반 사람이나 평범한 관상쟁이라면 오랜 경험에 따라 만들어진 관상 매뉴얼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특이한 관상쟁이는 그런 매뉴얼을 과감히 벗어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해석한다. 그는 과연 사기꾼인가?

이규보는 이상한 관상쟁이가 상식과 어긋나고 기대한 바와 다르다고 하여 사기꾼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차원에서 관상의 진실을 인생에 적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그 관상쟁이는 곧이곧대로 ‘낯빛이나 생김새’로 사람의 인생을 재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술사(術士)가 아니라 인생의 법칙으로 사람의 운명을 개척하고 이끌어가는 인생의 교사(敎師)라는 사실을 대화를 거쳐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판단하고 인생을 점치는 것은 고금이 크게 다를 수 없는 문제이다. 그리고 인생만이 아니라 복잡한 많은 사회현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글이 던지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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