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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013 서소(書巢)

by 혜당이민지 2008. 6. 19.

고전의 향기013    

서소(書巢)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경서로는 《역경》·《서경》·《시경》·《논어》·《맹자》·《중용》·《대학》 대전(大全)이 모두 50책 있고, 역사서로는 《한서(漢書)》 3종 총 88책이 있으며, 제자서(諸子書)로는 《주자대전(朱子大全)》 60책이 있고, 문집으로는 《전당시(全唐詩)》 120책과 《고문연감(古文淵鑑)》 몇 책이 있다. 이 책들이 있는 서재에 편액을 걸어놓고 ‘서소(書巢)’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자 친구 한 사람이 이견을 말했다.

“군자는 처신에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이름을 얻는 것에는 마음을 쓰지 않는다네. 자네는 서가 하나를 책으로 다 채우지도 못하면서 아득한 옛날의 육유(陸游) 선생에게 자신을 비유하였네.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자네는 어떻게 사는 것이 훌륭한 것인지를 보지 못하였는가? 잘 사는 사람은 달팽이 껍질 같은 초가집이라도 시서(詩書)를 읊조릴 수 있고, 말 한 필 겨우 돌릴 만한 마당을 가진 집이라도 자손에게 물려줄 만하네.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은 기둥을 화려하게 칠하고 기와에 꽃무늬를 새긴 집에 살더라도 촛불을 켜놓고 책 한 번 보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네.

비록 내 책이 적다고는 하지만, 요순우탕(堯舜禹湯)과 문무주공(文武周孔)의 도가 실려 있고, 반고(班固)와 범엽(范曄)이 역사가로서 내린 판단이 드러나 있으며, 대지가 만물을 받치고 바다가 모든 강물을 포용하는 듯한 주자의 학문이 실려 있고, 진나라 한나라 이래 수백 수천년 동안 활동한 작가의 모범적인 작품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네. 내가 좌우에 그 책을 꽂아놓고서 종신토록 그 안에서 머물러도 충분할 것일세. 군자가 책을 꼭 많이 구비해야만 하는가? 많지 않아도 되네.

더욱이 내 형님에게는 수천 권의 책이 있는데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제발(題跋)이 쓰여 있고, 아버지의 장서인이 찍혀 있네. 또 우리 아우 송택거사(松宅居士)는 일찍부터 도서를 수집하는 벽(癖)이 있어서 소장한 책이 또 수천 권을 상회하는데 그 책들을 만송루(萬松樓) 안에 보관하고 있네. 내가 내 집에 머물 때는 내 책을 읽으면 그만이고, 집밖을 나가게 되면 형님과 아우의 장서는 곧 내 책이요, 형님과 아우의 집은 내 서소(書巢)라네. 내 서소는 곧 소강절(邵康節)의 열두 곳에 만든 집_1)과 비슷하네. 그러니 육유 선생에게 비유하는 정도에 그치겠는가?

그렇지만 둥지[巢]란 것은 상고 시절의 집으로서 둥지가 변하여 사람이 사는 주택이 만들어졌고, 주택이 만들어지면서 음란한 기예가 흥성하게 되었네. 올바른 도를 실천하지 않고 올바른 학문을 밝게 추구하지 않게 된 것은 온갖 학술과 수많은 조류를 담은 엄청나게 많은 저 서적들이 그 도와 학문을 가려버렸기 때문이네. 내가 ‘서소’로 이름을 지은 것은 저 소박한 옛날로 돌아가려는 뜻이 있는 것이네. 그러니 또 어찌 책을 많이 모으는 데 힘쓰겠는가?”

이 문답으로 서소기를 삼는다.

- 이만수(李晩秀), 〈서소기(書巢記)〉, 《극원유고(극園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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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강절은 송대의 저명한 학자 소옹(邵雍)이다. 그의 친구들이 소강절이 방문하기를 원하여 소강절의 집 안락와(安樂窩)를 본뜬 집 열두 곳을 만들고 이 집을 행와(行窩)라고 불렀다. 행와는 후에 잠깐 머무는 편안한 집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극원유고》 2권 기(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장한종(張漢宗, 1768~1815)_책가도 병풍_경기도박물관 소장

해설


정조 순조 연간의 사대부인 이만수(1752년~1820년)가 쓴 글이다. 그의 호는 극원(극園) 또는 서소주인(書巢主人)이다. 자신의 장서를 모아놓은 작은 서재를 '서소(書巢)'라 부르고 그 의의를 밝힌 기문(記文)을 썼다. 서소란 새의 둥지처럼 나무 위에 지은 고대의 주거로 서재가 아주 협소하고 볼품이 없음을 표현한다.

그런데 서재 이름을 서소라고 붙이고 보니 송대의 유명한 시인 육유(陸游, 1125~1210)가 자기의 서재 이름을 서소라고 하고서 〈서소기(書巢記)〉를 쓴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아예 자기도 동명의 글을 써서 자기만의 서책과 독서행위를 바라보는 생각을 밝혔다.

그가 머무는 서재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그가 서재를 꾸미는 방식은 남들과 정반대였다. 그는 사부(四部) 곧,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대표하는 서책 한두 종만을 서가에 꽂고서 그것들 위주로 책을 읽고자 하였다. 책의 종류는 모두 합해봐야 13종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이들 책에 지혜의 정수가 담겨있으므로 서가에 가지런하게 놓인 그 책들을 평생토록 꺼내보면서 늙어도 넉넉하다고 자부하였다.

이러한 기본서만 가지고는 지식의 양이 너무 협소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족한 것은 선대로부터 내려온 많은 서책을 보관하고 있는 형님 급건재(及健齋) 이시수(李時秀)의 집에 가서 읽으면 되고, 또 장서벽이 있는 아우 이욱수(李旭秀)에게도 장서가 풍부하므로 거기에 가서 읽으면 된다. 형제의 장서가 곧 내 장서요, 형제의 서소가 곧 내 서소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기에는 학자들이 수많은 장서를 모아 서실을 꾸미는 벽(癖)을 지니고 있었다. 지식욕에 불타 있던 그들은 조선의 서책을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의 서책까지 탐욕스럽게 모아 수천 권에서 수만 권의 서책으로 서실을 채웠다. 그렇게 채워진 서책들이 장식용으로만 사용될 리는 없다. 다양한 학술과 문예와 지식이 사람들의 사유를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정통을 주장하는 사유로부터 벗어난 책읽기가 독서계를 휩쓸었던 것이다.

이만수의 이 글은 그러한 동시대의 풍조를 은연중에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런 지성사와 연관된 사실을 굳이 따지지 않아도 좋다. 탐욕스러운 책읽기보다는 절제된 책읽기, 거친 책읽기보다는 안정된 책읽기를 지향하는 하나의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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