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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012 천하의 한쪽 끝에서

by 혜당이민지 2008. 6. 19.

고전의 향기012        

천하의 한쪽 끝에서

1.

유사(流沙)는 〈우공(禹貢)〉에도 실려 있는 바, 성인의 교화가 미친 지역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유사라는 땅으로 정자의 이름을 삼는 이유를 나는 아무리해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옛날 어른들이 연회를 베풀거나 편안히 쉬는 곳에 편액을 걸 때에는, 이름난 산수를 빌려다 이름을 붙였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아름다운 일이나 아주 악독한 일을 올려서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의중을 밝혔다. 그마저도 아니라면 선대(先代)의 향리를 가져다 씀으로써 근본을 잊지 않으려는 뜻을 표시하였다.

저 까마득히 먼 지역이나 질이 좋지 않은 나쁜 마을로서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지도 않고 배와 수레가 통하지도 않는 곳, 예컨대 유사(流沙)와 같은 곳은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일컫는 것조차도 부끄러워한다. 그런데 그 위에 대서특필하여 문이나 창 사이에 걸어놓으려는 꿈이나 꾸겠는가! 그러니 우리 형께서 이것을 정자 이름으로 쓰려는 데에는 반드시 평범한 사람의 의중을 벗어난 뜻이 있을 것임을 알겠다.

2.

천하가 아무리 크더라도 성인의 교화는 천하와 함께 무궁하게 전개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오히려 겉에서 본 것이다. 인간의 몸이 아무리 작더라도 이 광대한 천하는 그 몸과 함께 하나로 어울린다. 이것은 안으로부터 본 것이다.

천하를 겉으로 보면, 동쪽 끝으로는 해가 뜨는 부상(扶桑)에 닿고, 서쪽 끝으로는 곤륜산에 닿으며, 북쪽은 초목이 나지 않고, 남쪽은 눈이 내리지 않는다. 이런 지역까지도 성인의 교화가 적시고 뒤덮고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천하가 하나로 통일된 때는 늘 적었고 분열된 때는 항상 많았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마음 속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을 안으로부터 살펴보면, 힘줄과 뼈가 묶여 있고 성정(性情)이 약하게 작용하는 중에 마음이 그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우주를 감싸 안고 있으며, 현상과 사물을 접하여 대응하고 있다. 위세와 무력으로도 빼앗을 수 없고, 간교한 꾀와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존재로서 우뚝하게 서있는 것이 바로 나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비록 천하의 한쪽 끝 치우친 곳에 처박혀 가만히 엎드려 숨을 죽이고 숨어 있다고 해도, 그의 흉금과 도량은 성인의 교화가 미치는 천하 사방 아무리 먼 곳이라도 이 마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형의 생각이 아무래도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 동해바다

3.

나는 일찍부터 천하 사방을 두루 노닐려는 뜻을 가졌으나 이제는 벌써 지쳐버렸다. 신축년 겨울 병란을 피해서 동쪽으로 갔을 때 비로소 영해부(寧海府)에 이르렀다. 이곳은 바로 우리 외가로서 우리 형이 살고 있다. 영해는 동쪽으로 큰 바다에 닿아서 일본과 이웃하고 있으므로 참으로 우리나라의 동쪽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요행히 영해의 한 모퉁이에 이르렀으니 천하의 끝 중에서도 끝에 있는 셈이라 이제 다른 곳으로 돌아가도 되겠다. 더욱이 유사정(流沙亭)과 마주한 땅이야 말해 무엇 하랴?

정자 위에서 술잔을 들고 있는데 기문을 써주기를 청하므로 기쁜 마음으로 쓴다. 지정(至正) 임인년(1362).

- 이색(李穡), 〈유사정기(流沙亭記)〉,《목은문고(牧隱文藁)》

※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고전번역서 《동문선》 72권 기(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설


고려말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목은(牧隱) 이색(1328~1396)이 쓴 글이다. 경상북도 영해부 곧, 현재 울진군 평해읍에 있었던 유사정이란 정자에 붙인 기문(記文)이다. 글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신축년(1361) 곧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대거 고려로 침입해 들어와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그때 공민왕이 안동 지역으로 피란하였는데, 목은은 왕을 모시고 함께 이 지역에 왔다가 외가가 있는 영해를 방문하였다. 이 글에 나오는 형은 그의 외가쪽 친척일 텐데, 그의 청탁으로 이 글을 짓게 되었다.

목은의 아버지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영해 사람인 김택(金澤)의 딸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에 목은은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목은은 관어대부(觀魚臺賦)와 같은 영해를 묘사한 작품을 지었는데 이 글도 그 중의 하나이다. 글은 영해의 관아 동쪽 바닷가에 위치한 유사정(流沙亭)이란 정자를 묘사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 정자는 평해에 있는 월송정, 관어대와 더불어 고려 때부터 이름이 있는 정자였다. 조선 중기까지 잘 보존되고 있었다고 한다. 유사정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아마도 백사장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바닷물에 휩쓸려 다니는 모래사장을 흔히 유사(流沙)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월송정그림(허필)-선문대학교박물관소장

문제는 목은이 유사를 이러한 의미로 해석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어떻게 보면 좀 엉뚱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목은은 유사를 고유명사로 해석하였다. 내 생각에 목은은 정자 이름을 오독하였다고 본다. 하지만 목은이 유사정이라고 명명한 본래의 이유를 몰라서 그랬다고 보기는 어려우니, 의도적으로 오독을 한 것이다. 어쨌든 《서경(書經)》의 〈우공(禹貢)〉에서는 중국의 서쪽 끝에 있는 지역의 대표로 유사를 들었는데 목은은 이 지명을 가져다 정자 이름을 삼았다고 해석하였다. 유사는 중국 강역의 서쪽 끝으로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을 상징해왔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지명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성정을 도야하거나 여유를 즐길 멋진 정자에 붙였단 말인가? 이것이 목은이 이 글을 이끌어가고 있는 논지의 핵심이다.

천하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라도 성인의 교화가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먼 곳에 사는 사람이 원대한 꿈을 가진다면 유사와 같은 불모의 땅에 사는 사람이라도 세계의 중심과 소통할 수 있다. 그런 의의를 목은은 동해 바닷가 정자에서 꿈꾸었다. 지금 천하의 외진 변방에 살지만 언젠가는 중심에 서보겠다는 무한한 의지를 피력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이 성사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무모한 생각일까? 그는 마음이 있는 한 가능하다고 본 듯하다. 마음은 미약하지만 “우주를 감싸 안고 있으며, 현상과 사물을 접하여 대응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고, 그 마음이 작용할 때 “위세와 무력으로도 빼앗을 수 없고, 간교한 꾀와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존재로서 우뚝하게 서있는 것이 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목은은 몽골이 세계를 통일한 상태를 무척 의의가 있다고 바라보았다. 그는 세계인으로 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온 세계가 하나로 통일되어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것을 꿈꾸었던 듯하다. 그런 의식을 가졌고 또 국난에 처했기에, 한가롭게 경치를 바라보며 여유를 즐겨야 할 유사정에서 이러한 의지가 넘치는 글을 쓴 것이나 아닐까?

구한말에 소려(小黎)는 이 글을 보고서 “흉금과 국량이 천하만큼이나 광대하다(胸襟宇量, 同其廣大.)”고 평한 적이 있다. 한 인간이 천하를 상대로 우뚝하게 서서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의지를 발견하고서 내린 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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