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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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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꼭 지어야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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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내가 소유하지 않아도 즐기는 데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원림(園林)이나 누정(樓亭) 뿐이겠는가? 천하의 사물 가운데 그렇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원림이나 누정의 경우가 특별히 더 그런 것뿐이다.
서울에서 수십 리 이내의 가까운 지역에는 사람들이 조성한 별서(別墅)와 농장이 많다. 어떤 것은 강가를 따라 있고, 어떤 것은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어떤 것은 산을 등지고 계곡에 걸쳐 있기도 하다. 제각기 멋진 풍경 하나쯤은 갖추고 있다. 그러나 산수(山水)를 평가하고 논하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저쪽 경치를 들어다 이쪽 경치를 비교하면서 앞다퉈 제가 본 풍경을 자랑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정말 콧방귀를 뀔 일이다.
빼어난 경관과 아름다운 풍경을 뽐내는 천하의 명소가 어디 한두 군데에 불과하랴? 또한 그 풍경이 일정할 것이며 그 평가가 동일할 수 있겠는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이는 풍경이 바뀌고, 지경(地境)의 변화에 따라 감정의 느낌이 달라진다. 같은 장소라 해도 경관이 차이가 나고, 같은 풍경이라도 때에 따라 변모한다. 그렇건마는, 만약 어느 것이 낫고 어느 것이 모자라다며 제각기 자랑하고, 어느 것이 뛰어나고 어느 것이 뒤진다고 제각기 평을 내린다면, 이것은 맛좋은 술에게 소금처럼 짜지 않고 왜 맛이 좋으냐고 혼내는 격이요, 양고기와 돼지고기에게 채소와 과일처럼 담박한 맛을 내지 않고 왜 그렇게 기름진 맛을 내느냐고 화를 내는 격이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겠다면, 천하의 이름난 산과 빼어난 승경(勝景)을 모조리 제가 소유한 뒤에라야 비로소 마음이 상쾌해지리라. 그러면 작은 볼거리에 구속되어 큰 볼거리를 놓치는 사람이 되지나 않을까?
그러나 하지장(賀知章)에게 경호(鏡湖)를 하사하라고 조칙을 내린 일도 있고, 전공(錢公)에게 화산(華山)을 준다는 문권을 떼어준 일도 있다_1). 이는 참으로 고상하고 우아한 일이 아닐 수 없으므로 그런 일을 모조리 해서는 안 될 일로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 다만 세상에는, 사는 집은 퇴락하고도 교외 별장의 단청은 휘황찬란한 경우도 있고, 선인(先人)이 살던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해도 공인(工人)을 불러 저 사는 집의 난간을 조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자들이 범희문(范希文)의 이 말을 가져다 다시 읽어본다면 부끄럽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 |
1) 당나라 시인인 하지장(659~744)이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려 할 때, 현종이 조칙을 내려 그에게 경호(鏡湖)의 섬천(剡川) 한 구비를 하사한 일이 있다. 전공(錢公)의 고사는 미상. | |
- 박규수(朴珪壽), 〈범희문회서도원림(范希文懷西都園林)〉, 《상고도회문의례(尙古圖會文義例)》 | |
△▲ 금오계첩(金吾契帖, 1768년)에 수록된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1775)의 그림. 남산 북쪽 기슭 골짜기에 걸터 앉은 천우각(泉雨閣) 주변의 풍경을 그렸다. _ 경기도박물관 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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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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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재(桓齋) 박규수(1807~1877)가 쓴 명저 《상고도회문의례(尙古圖會文義例)》에 실려 있는 글이다. 북송(北宋)의 명신(名臣)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 늙어서 저택을 새로 짓지 않겠다고 말한 사연을 바탕으로 삼아 그의 생각을 펼친 글이다. 〈범희문회서도원림(范希文懷西都園林)〉은 본래 주자(朱子)가 편찬한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綠)》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범문정공(范文正公, 범중엄)이 항주(杭州)에 머물 때 벼슬에서 물러날 뜻이 있다고 판단한 자제들이, 틈을 타서 낙양(洛陽)에 저택을 짓고 정원과 남새밭을 만들어 노년을 즐길 터전을 만들자고 청하였다. 그러자 문정공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만약에 도의(道義)를 즐긴다면 육체의 즐거움을 무시할 수도 있다. 더욱이 주택이야 말할 나위 있겠느냐? 내 나이 이제 육십을 넘겼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거늘, 저택을 짓고 남새밭을 만들 계획을 한들 어느 시절에 거기에 살겠느냐? 내 걱정은 지위가 높은 데도 물러나기 어려운 데 있지, 물러난 뒤에 머물 곳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서도(西都)는 사대부(士大夫)의 원림(園林)이 연달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들은 항상 거기에서 놀지 못한다. 그 누가 내가 그곳에서 노니는 것을 막겠느냐? 굳이 내가 원림을 소유한 뒤에라야 즐기겠느냐?’”
수많은 선비들로부터 존경받는 범중엄의 겸허함과 절도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범중엄은 자신이 늙었기 때문에 새로 집을 지을 필요가 없고, 또 직접 소유하지 않아도 즐길 원림이 많다는 두 가지 취지를 밝혔다. 박규수는 그 가운데 직접 소유하지 않고도 원림을 비롯한 많은 것을 즐길 수 있다는 취지로 새 글을 썼다. 그의 글에는 당시 조선의 현실이 깊이 투영되어 있다. 당시에는 서울 주변의 경관이 좋은 곳에 사대부들이 경쟁적으로 저택과 정원을 꾸미고, 서로를 비교하여 평가하려는 풍조가 유행하였다.
물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별서를 꾸미고 그 멋을 즐기는 호사취미가 나쁘다고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꼭 별서를 제 소유로 만들어야만 제대로 즐기는 것이 되고, 또 꼭 다른 것과 비교를 통해서 월등히 나은 것을 가져야만 기쁨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풍경이 좋고 나쁜 것도 주관에 따라 다르므로, 일정한 구경거리나 미적 기준이 있지는 않다. 즐기려는 마음이 있으면 제 소유든 아니든 상관없이 어떠한 풍경이든지 제대로 즐길 수가 있다. 또 풍경이란 것은 철따라 장소 따라 변화하여 일정함이 없으며, 풍경을 보는 사람의 시선과 감정도 경우에 따라 다르다. 요컨대, 남의 평가에 따라 풍경을 볼 필요 없이 제 느낌에 따라 보면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박규수는 범중엄의 사연을 놓고 조선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속물적 행동을 비판하였다. 그렇기에 이 글을 두고 이정관(李正觀, 1792~1854)은 박규수를 “세속을 아주 질시하는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그렇지만 현재의 기준에서 볼 때 박규수의 지적은 비교적 적절하다. 하기야 그의 관점은 국가와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띤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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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등 다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