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고전의 향기042 - 또 한 해가 저무네

by 혜당이민지 2010. 8. 20.

고전의 향기042   

또 한 해가 저무네

사람은 어릴 때에는 부모에게 양육되고, 장성해서는 제 스스로 먹고 살며, 늙어서는 자손들로부터 봉양을 받는다. 이것이 변함없는 이치이다. 어릴 때에는 나를 돌보고 나를 보호하는 부모만을 오로지 의지할 수밖에 없어 부모에게 양육되지만, 늙어서는 근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손들로부터 봉양을 받는다. 장성한 이후에는 반드시 사농공상(士農工商) 네 부류 백성의 하나로서 주어진 재능을 따라 학습하면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식을 기를 수 있고, 입신양명(立身揚名)도 꿈꿀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정의 빼어난 인물이나 한 지방의 준재를 넘볼 수도 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제 스스로 먹고 산다는 말이다.

지금 나는 제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할 때에 있다. 그렇건만 성품이 원래 거칠고 못난 데다 의지와 기상이 엉성하다. 재물과 여색(女色)에는 무덤덤하지만 때때로 형세에 눌려 남들 하는 대로 행동할 때가 있다. 물론 본래 성품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사농공상 네 부류의 직업을 힘써 배우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세월은 덧없이 흘러 이제껏 이뤄놓은 것이 없다. 한밤중에 베개를 베고 누워 생각하면 개탄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무릇 인생에는 세 가지 썩지 않는 것이 있다. 가장 나은 것은 도학(道學)이요, 그 다음 것은 공적(功績)이요, 또 그 다음 것은 문장(文章)이다. 도학과 공적은 그보다 더 높은 것이 없다. 문장의 경우에는 비록 재능을 가진 자에 눌리기는 하지만 열심히 힘껏 배우면 세상에 쓰이기도 하고, 명성도 얻을 수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 나는 게으름이 아예 성품으로 변한 데다 품성 또한 엉성하다. 아침 저녁거리 죽조차도 내 스스로의 힘으로 장만하지 못하고 집안사람에게 수고를 끼친다. 이야말로 옛사람이 말한 천지 사이의 한 마리 좀벌레이다.

아! 사람은 어릴 때에는 부모에게 양육되고 늙어서는 자손들로부터 봉양을 받는 것이 변함없는 이치이지만, 장성해서도 제 한 몸 먹고 살지도 못하니 세 번을 반성해보고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옛날에 감라(甘羅)는 나이 열넷에 제왕의 스승이 되었고, 손책(孫策)은 열일곱 살에 강동(江東) 땅을 평정하였으며, 등우(鄧禹)는 스물네 살에 공후(公侯)에 봉해졌다._1) 모두들 세 가지 썩지 않는 것 가운데 한 가지씩 차지했다. 하지만 그들이 겨우 제 한 몸 먹고 사는 데 그쳤겠는가?

돌아보면 올해도 벌써 저물어간다. 스무 날만 지나가면 나도 서른 살이 넘는다. 옛날 뜻있는 선비는 가을을 슬퍼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세월이 저물어가는 것에 느낌이 생겨나, 뜻한 바와 학업이 어긋나는 것을 한탄하고 있다. 그래서 한 해가 저무는 것을 슬퍼하는 글을 쓴다.

1) 감라는 진나라의 장군, 손책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군, 등우는 후한 광무제 때의 장군으로 모두 젊은 나이에 공훈을 세운 인물이다.

- 이장재(李長載), 〈세모서(歲暮序)〉, 《나석관고(蘿石館稿)》

해설


이장재(李長載)는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의 저자 이규상(李奎象)의 아들이다. 한산이씨(韓山李氏) 명문가 후예로서 학문이 깊었으나 큰 벼슬을 하지 못한 채 일생을 마쳤다. 그는 서른 살이 넘은 어느 해 겨울, 그 해가 겨우 스무날 정도 남았을 때 한 해를 되돌아보는 글을 한 편 썼다. 글의 제목은 ‘세모서(歲暮序)’로 세모를 보낸다는 의미이다.

이 글에서 키워드는 ‘기른다’, 곧 ‘양(養)’이다. 그에게 인생은 세 단계로 이루어졌고, 기르는 방식의 차이로 설명이 가능하다. 어렸을 때에는 부모에게 양육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봉양을 받는다. 그렇다면 젊은 시절에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봉양하는 때인데,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 일해 스스로 먹고 사는 단계이다. 당시로 보자면 사농공상(士農工商) 어떤 직업군에 속해 일을 해서 자신도 먹고 가족도 먹여 살려야 한다. 그것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먹고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서른을 넘긴 자신은 어떤가? 스스로 생각해도 그리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재물에 탐욕스러운 것도 아니고, 여자나 밝히는 족속도 아니다. 그러나 당당하게 무슨 일을 한다고 할 수가 없다. 사람이면 사농공상의 네 부류 가운데 하나에 속해야 할 텐데, 자신은 선비에 속하기는 하지만 벼슬도,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처지에 당당히 선비임을 내세우기도 그렇다. 아침저녁 먹는 죽도 내가 일해서 마련한 것이 아니라 집안의 아내나 부모가 마련해 놓은 것을 축내는 존재다. 자기가 주관해서 하는 일이 없다. 그야말로 천지간의 한 마리 좀벌레이다.

그럭저럭 서른을 넘긴 이장재가 한 해를 또 보내면서 현재 처지를 심각하게 고민해보니 자신은 영락없이 일하지 않고 먹는 존재라는 자각이 든다. 조급한 마음,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으리라. 십대 이십대에 큰일을 한 자와 비교하자니 사치다. 그의 고민과 좌절은 현대적으로 표현한다면, 서른이 넘은 나이에 백수로 살아가는 것을 향해 있다. 200년 전의 글이지만 경제위기로 사회가 불안한 2008년 연말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