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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법탐원/서예감상-곽노봉선생님

[스크랩] 18. 낙신부십삼행(晉, 王獻之)

by 혜당이민지 2010. 5. 1.

 

18. 洛神賦十三行(晉, 王獻之)


왕헌지(王獻之, 344-386)의 자는 자경(子敬)이고 어렸을 적 이름은 관노(官奴)로 왕희지의 일곱째 아들이다.  벼슬은 건무장군(建武將軍)과 오흥태수를 거쳐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왕대령(王大令)’이라 불렀다.

왕헌지는 어렸을 때부터 그의 부친인 왕희지와 모친인 치(郗)씨에게 직접 서예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많은 영향이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헌지 나이 7-8세 때 한참 열심히 글씨를 쓰고 있는데 왕희지가 그의 뒤에서 붓을 뺏으려다 뺏지 못하자 매우 놀라면서 “이 아이는 뒤에 큰 이름이 있을 것이다.”라고 칭찬했단다.  왕희지는 이런 그에게 일찍이 <악의론(樂毅論)>과 <필세설(筆勢說)> 1편을 친히 써주어 학습하도록 했다.  왕헌지 나이 16세(359) 때 아버지인 왕희지에게 서체를 고치길 간하면서 “옛날의 장초는 웅대하고 표일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사람들은 그것이 六書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점과 획을 대담하게 생략한 이치를 탐구하여 초서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마구 쓰는 사이에서 나타나는 필획의 특수한 부분을 찾는 거산 못하니, 대인의 글씨체를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법이라는 것은 일정하지 않고 일이란 변화를 귀히 여기는 것이 때문에 반드시 고법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왕희지는 이를 들은 다음 단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왕희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 왕헌지는 과연 부친을 계승해 고행(稿行, 즉 행초서)에서 별도의 면목을 나타내 아버지와 이름을 나란히 하며 ‘이왕(二王)’이라 불렸다.

왕헌지는 중국 서예사상 가장 조숙하게 뛰어난 천재 서예가라 할 수 있다.  역사에서 일류 서예가라고 하면 거의 모두가 40여 년의 학서 과정을 거친 뒤에 비로소 탁월한 성취를 얻었다.  그러나 왕헌지는 그의 부친이 죽었을 때 겨우 18세였기 때문에 아직 일류 대가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전체 남조(南朝)에서 그의 명성은 거의 부친을 능가했다.  불행한 것은 당나라에 들어와 이세민이 왕희지를 찬양하고 왕헌지를 극도로 폄하했기 때문에 허다한 작품들이 유실되거나 아니면 왕희지의 이름 아래 귀속됐다는 점이다.  성당에 들어와 장회관이 왕헌지를 재평가 하며 <서의(書議)>에서 말하길 “왕헌지의 재주와 식견은 고원하여 행초의 밖에서 별도의 문을 열었다.  대저 행서는 초서가 아니고 해서가 아니면서 모난 것을 떠나 둥근 것을 따르면서 서로 엇비슷한 사이에 있다.  해서를 겸하면 해행이라고 하며 초서를 띠고 있으면 행초라고 한다.  왕헌지의 필법은 초서도 아니고 행서도 아니다.  흐름은 문득 초서와 같지만 행서로 넓게 벌려 놓은 가운데 초서가 또한 그 중간에 처하고 있다.  옛날 습관에 의지함도 없고 또한 제약이나 법칙의 구속됨에서 편하게 한 다음 빼어난 아름다움을 나타내면서 간략하고 편한 것에 힘을 썼다.  뜻은 달리고 정신은 방종하여 뛰어나고 한가하면서 일에 임하여 마땅함을 만들고 뜻을 좇아서 편안함에 만난다.  바람이 불면 비가 흩어지고 윤기 있는 색에 꽃이 핀 것 같음이 있어서 필법과 필세의 가운데서 가장 풍류가 있는 자이다.  왕희지는 해서와 행서의 요령을 잡았으며 왕헌지는 행서와 초서의 권위자가 되었다.  그리고 왕희지의 글씨는 영활하면서도 온화하고 왕헌지의 글씨는 신채가 나타나면서도 준걸의 맛이 있어 모두가 고금의 뛰어난 서예가이다.”라고 했다.  행초서는 행해서에 비해 더욱 넓고 표일하며 실용적이니 이 방면에 대한 개척은 왕헌지의 공로라 할 수 있다.

<낙신부십삼행>은 황헌지의 글씨로 소해(小楷)이며 송나라 때 묵적이 잔존했다.  가사도(賈似道)가 먼저 9행을 얻고, 다시 4행을 얻어 물처럼 파란색의 단석(端石)에다 새겼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이를 <옥판십삼행(玉板十三行)>이라고도 한다.  이는 왕헌지의 유일한 소해로 역대로 평가가 매우 높아 소해의 극치로 여긴다.  풍무(馮武)는 《서법정전(書法正傳)》에서 “자획의 정신이 표일하고, 묵채가 비동하여 천하 법서의 으뜸이다.”라고 했다.  용필로 보면 종횡으로 펼치고 체세를 벌렸으며, 세로획의 굳셈은 철과 같아 창들이 서로 다투는 형세가 있다.  사전은 둥근 가운데 골이 섯고, 모나면서도 간단하고, 맑고 굳세면서 빼어남이 뛰어나 당시에서 뛰어났다.  왼쪽 삐침이 짧고 파임이 길어 풍류의 자태를 다하고, 기이하고 바름이 서로 섞여 묘하게 우아하고 표일한 기운을 얻었다.  대소가 착락되며 글자의 진짜 정취를 얻었고, 기는 험준하고 운은 화목하여 묘한 소리가 신령한 돈대에 발하고, 웅장하고 기이하면서 아름다운 것이 속의 정감으로부터 나왔다.  조맹부가 임종 전에 이에 대한 발문을 지어 “<낙신부십삼행>은 250자로 자획의 정신이 표일하고, 묵채가 비동하다.”라고 했으니 이는 정말 ‘천하제일소해(天下第一小楷)’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한국서학연구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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