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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법탐원/서예감상-곽노봉선생님

[스크랩] 15. 난정서(晋, 王羲之)

by 혜당이민지 2010. 5. 1.

 

15. 蘭亭序(晋, 王羲之)


서예사에서 왕희지처럼 고금을 통틀어 남녀노소가 모두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서예가는 없을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도 그는 확실히 위대한 천재 예술가로 일종의 아속(雅俗)이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예술 풍격을 창조했다.  그리고 후세의 서단에 가장 심각한 영향을 주었던 서예가였다.

왕희지(王羲之, 303-361)의 자소는 일소(逸少)이고, 낭야(瑯琊, 지금의 山東省 臨沂) 사람이다.  그는 소년시절에 진나라가 남으로 천도하는 것을 따라와 회계산음(會稽山陰, 지금의 浙江省 紹興)에 거주했다.  그의 조부와 부친 그리고 백부와 숙부 모두가 당시 조정의 중신이었으며 동시에 유명한 서화가였기 때문에 왕희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말이 어눌했으나 자라면서 심지가 굳은 것으로 유명했다.  조정의 공경대부들이 그의 재주를 소중하게 여겨 여러 번 그를 추천하려 했으나 빈번히 거절당했다.  뒤에 양주자사로 있던 그의 친구 은호(殷浩)의 간곡한 권유에 의해 우군장군(右軍將軍)과 회계내사(會稽內史)를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왕우군(王右軍)’이라 불렀다.  그러나 뒤에 태원의 왕술(王述)과 불화로 인해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는 은거했다.  그는 만년에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도교를 믿어 약석(藥石)을 캐는 일이라면 천리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초야에서 일생을 보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다채롭고 기이한 고사들이 매우 많다.

왕희지는 처음에 숙부인 왕이(王廙)에서 서화를 배웠는데, 그는 왕이의 “그림에 나의 그림이 있는 것처럼 글씨에 나의 글씨가 있어야 한다.”라는 정신에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는 뒤에 다시 위부인(衛夫人)에게 글씨를 배웠다.  글씨를 배운지 3년 만에 날로 공력이 몰라보게 진보하자 위부인은 깜짝 놀래면서 왕책(王策)에게 “이 아이가 반드시 용필의 비결을 본 것 같습니다.  최근의 그의 글씨를 보니 문득 대성할 재주가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위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길 “이 아이는 반드시 나의 이름을 가릴 것입니다.”라고 했다.  뒤에 왕희지는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종요(鍾繇), 양곡(梁鵠), 채옹(蔡邕), 장창(張昶) 등 명인들의 글씨를 보았다.  그는 연못물을 전부 검게 만들 정도로 정성을 다해 글씨 공부를 했다.  그는 만년에 고법의 여러 장점들을 널리 모으고 이를 감안해 새로운 뜻을 나타내어 한․위의 질박한 서풍을 변화시켜 주미유편(遒媚流便)한 새로운 서체를 창조했다.  이는 이후의 문자 통일에 전무후무한 역사적 작용을 했다.

영화구년(永和九年, 353) 3월 3일은 서예사상 가장 기념적인 날이다.  그날은 날씨도 맑고 화창해 왕희지는 사안(謝安), 사만(謝萬), 손작(孫綽) 등 42명과 함께 소흥의 난정에서 계제사를 행했다.  우주와 만물을 쳐다보며 맑게 흐르는 물에 임하여 술을 마시고 준령을 보며 시를 지어 각자의 회포를 풀며 즐겁게 놀았다.  흥이 난 나머지 왕희지는 즉석에서 휘호를 하여 난정시집을 위한 서문을 썼으니 이것이 바로 고금에 가장 유명한 <난정서>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 왕희지가 사용했던 것은 서수필(鼠鬚筆)과 잠견지(蠶繭紙)이며, 행필은 굳세고 아름다운 것이 절대로 다시는 나올 수 없다고 한다.  이후 왕희지가 이것을 다시 백여 번을 썼으나 처음만 못했다고 해서 이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면서 집안의 비보(秘寶)로 전했다.  왕희지의 행서는 이것으로 최고봉에 올라 세상에서 이를 ‘천하행서제일(天下行書第一)’이라 일컫는다.  이 원본은 일찍이 이세민이 얻어 조모(趙模), 한도정(韓道政), 제갈정(諸葛貞), 풍승소(馮承素) 등에게 임모하도록 하여 약간의 부본을 남겨두고는 진적은 그와 함께 소릉에 묻혔다.  그리하여 절대의 명작이 세상에 사라졌다.  세상에 전하는 몇 본의 임모본 중에서 가장 원작에 가까운 것은 풍승소의 구모본(鉤摹本)이다.

이 묵적을 보면 전문은 28행으로 324자이다.  순전히 행서로 씌어져 있어 초서는 하나도 없으며, 서체는 매우 바르고 용필은 천변만화를 이루면서 묘하게 자연과 합한다.  점과 획이 어울리고, 기맥이 관통하며, 글자로 인해 형태가 서고, 형태로 인해 형세가 생기니 손과 마음이 함께 잊고, 정과 문장이 함께 풍족하다.  용필은 조용하면서도 우아하고, 골력은 안으로 감추어져 있어 극도의 경지에 도달했다.  이에 대해 이세민은 <왕희지전론(王羲之傳論)>에서 “자세히 고금을 살피면 전서와 비단의 글씨가 정갈하며 모든 아름다움을 다한 것은 오직 왕희지뿐인가 보다.  그 점을 끄는 공교함을 보아 마름질을 하여 오묘함을 이룬다.  연기와 안개 그리고 이슬이 맺히는 형상은 마치 끊어진 듯하면서도 연결되어 있으며 봉황새가 날고 용이 서리어 있는 형세는 마치 기울이면서도 오히려 곧은 것 같다.”라고 했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한국서학연구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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