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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법탐원/서예감상-곽노봉선생님

[스크랩] 13. 평복첩(晉, 陸機)

by 혜당이민지 2010. 5. 1.

 

13. 平復帖(晉, 陸機)


이 작품은 명인의 묵적으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 중에서 가장 빠른 작품이다.

육기(陸機, 262-303)의 자는 사형(士衡)이고 오군화정(吳郡華亭, 지금의 上海市 松江) 사람이다.  그는 서진시대에 유명한 문학가, 비평가, 서예가였다.  조부인 육손(陸遜)과 부친인 육무(陸撫)는 모두 오나라의 명장이었다.  오나라가 망한 뒤에 육기는 동생 육운(陸雲)과 함께 낙양에 가자 장화(張華)가 그의 문재를 매우 아껴 제주(祭酒)로 추천했다.  후에 성도왕(成都王)이 장사왕(長沙王)을 토벌할 때 그는 후장군(後將軍)과 하북대도독(河北大都督)을 담임했다.  그는 사무적인 일로 환관인 맹구(孟玖)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악랄한 그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육기가 싸움에 져서 후퇴를 했다고 참소를 하여 결과적으로 성도왕인 사마영(司馬穎)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시 104수를 남겼고 또한 『문부(文賦)』1편은 역대로 문학비평의 경전으로 여겼다.  이 <평복첩>도 그가 썼다고 전하는 작품이다.

<평복첩> 묵적은 지본(紙本)이며 초서로 9행에다 약 87자를 썼는데 지금 84자가 남아있고 낙관이 없다.  이 묵적은 선화내부에 있다가 명나라 만력(萬曆, 1573-1620) 연간에 한세능(韓世能)이 소장했다가 후에 장축(張丑)에게 귀속됐으며 동기창의 발문이 있다.  후에 다시 청나라 내부에 들어갔다가 현재는 고궁박물원에 수장되어 있다.  종요의 <천계직표(薦季直表)>는 이미 없어졌고 또한 진적이 아니기 때문에 역대로 <평복첩>을 법첩의 종주로 삼고 있다.  이 첩의 앞에 ‘晉平原內史吳郡陸機士衡書’라고 작은 해서로 쓴 첨지가 붙어있으나 관인(款印)은 없다.  이보다 더욱 앞에는 송 휘종인 조길(趙佶)이 수금체로 ‘陸機平復帖’이라고 5자를 해서로 쓰고 아래에 쌍룡원인(雙龍圓印)을 찍은 것이 있다. 

서방달(徐邦達)은 『고서화과안요록(古書畵過眼要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첩의 결구는 장초와 같다.  그러나 도필(挑筆)과 파세가 없어 『순화각첩』 제2책에 새겨진 서진시대 초기 위관(衛瓘)의 <돈수주민첩(頓首州民帖)>과 대략 같기 때문에 마땅히 ‘초고’의 글씨로 보아야 한다.  필법이 매우 소박하고 졸하며 닳은 붓털의 중봉으로 곧게 내려서 돈좌(頓挫)가 비교적 적다.  신강 일대에서 발견한 한, 진시대의 목간과 종이 조각에 씌어진 묵적의 어떤 초서는 이 첩의 필법과 매우 흡사하다.  비록 땅은 남북으로 나뉘어졌지만 당시 서풍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이 말은 매우 의미가 있다.  만약 이 첩을 누란(樓蘭)에서 출토한 위진시대의 간독에 씌어진 초서와 비교하면 용필은 물론 서풍까지 일맥상통하고 있다.  이는 당시 유행했던 장초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며 전형적인 풍격과 옛날 장초의 진면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첩의 용필은 매우 고졸하고 순수하며 붓을 곧게 일으켜 곧게 내렸기 때문에 필치가 둥글고 근력이 풍부하다.  이전 사람은 이를 독필서(禿筆書)라고 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위, 진시대 간독의 초서를 보면 대부분 이러했다.  이는 중간이 잘라지고 무겁게 누르며 붓을 거둘 때 곧게 들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옛날 붓과 지금의 붓이 달라서 붓 허리가 풍요로워 종이에 깊게 들이면 필치는 자연스럽게 이와 같이 된다.  이 첩의 글씨가 후인의 글씨와 다른 점은 용필이 매우 간결하고 깨끗하면서 세련되었으며 비록 초서라 하더라도 단필(斷筆)을 위주로 하며 형태의 연결을 구하지 않고 정신을 꿰뚫어 흐르도록 했다.  또한 기필과 수필은 둥글고 소박해 연미함을 취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고질금연(古質今姸)’이라 하겠다.  결체는 발종하고 표일하며 기운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바르고 기운과 풍격은 고고하며 격조는 평담하고 그윽하다.  『오씨서화기(吳氏書畵記)』에서는 “글씨가 우아하고 바르며 사람들에게 아리따움을 구하고자 함이 없다.  대저 평담하고 자연스런 정취를 얻어 세상에서 따를 수 없는 신품이 됐다[書法雅正, 無求媚于人. 蓋得平淡天然之趣, 爲曠代神品也].”라고 했다.  부증상(傅增湘)은 발문에서 “필력이 굳세고 강해 마치 오래된 등나무와 같다.  『순화각첩』에 있는 진나라 사람의 글씨와 같지 않다.  옛사람은 육기가 장초를 잘 써서 삭정의 <출사송>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고 했으나 진계유(陳繼儒)는 그 글씨가 삭정의 필치를 얻었다고 했다.  혹자는 그 필법이 둥글고 혼후하여 육즙과 물 같다고 했으나 지금 자세히 저울질해보면 모든 그러한 것은 아니다.……이 첩은 장초가 아니라 운필에 오히려 전서 필법이 존재하니 이를 얻은 것 같다[筆力堅勁倔强, 如萬歲枯藤. 與閣帖晉人書不類. 昔人謂士衡善章草, 與索幼安出師頌齊名, 陳眉公謂其書乃得索靖筆. 或有論其筆法圓渾, 與大羹玄酒者, 今細衡之, 乃不盡然……謂此帖非章草, 運筆猶存篆法, 似爲得之矣].”라고 했다.  운필에서 ‘안삼고(顔三稿)’와 서로 같은 곳은 확실히 전주(篆籒)의 기운이 있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한국서학연구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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