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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법탐원/서예감상-곽노봉선생님

[스크랩] 11. 천계직표(魏, 鍾繇)

by 혜당이민지 2010. 2. 19.

 

11. 薦季直表(魏, 鍾繇)


한나라 말과 삼국시대는 서체 변천이 가장 격렬한 시기였다.  우리들은 현재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서체인 해서와 행서 그리고 금초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온양(醞釀)되어 이루어졌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역사상 유명한 대서예가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종요(鍾繇)가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종요(鍾繇, 151-230)의 자는 원상(元常)이고, 영천장사(穎川長社, 지금의 河南省 長葛) 사람이다.  그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걸출한 서예가이며 정치가였다.  조조(曹操)가 집권했을 때 그는 시중사예교위(侍中司隸校尉)와 지절감관중제군(持節監關中諸軍)을 지냈다.  조비(曹丕)가 황제가 되었을 때는 정위(廷尉)를 지내다 태위(太尉)에 올랐다.  명제인 조예(曹睿)가 즉위하자 승상을 배수받고 태부(太傅)에 올라 정릉후(定陵侯)에 봉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종태부(鍾太傅)’라 불렀다.

종요는 어려서부터 특별히 배우기를 좋아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가 포독산(抱犢山)에 들어가 글씨 공부를 할 때 산석과 수목을 온통 먹으로 물들였다고 한다.  처음 위탄(韋誕)에게 채옹(蔡邕)의 필법을 구하고자 할 때 위탄이 이를 감추고 전해주지 않자 종요는 화가 나서 가슴을 쳐 피를 토하고 거의 죽을 뻔했다.  다행히 조조가 오령단(五靈丹)으로 그의 목숨을 구했다.  위탄이 죽은 뒤 그는 사람을 시켜 그의 묘를 파내어 마침내 채옹의 필법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조희(曹喜), 채옹(蔡邕), 유덕승(劉德昇) 등을 법으로 삼아 여러 장점을 널리 취해 이를 융회관통(融會貫通)했다.  그는 해서, 예서, 행서, 초서 등에 모두 능했는데, 특히 해법에 정통해 세상에서 그를 ‘예기(隸奇)’라 불렀다.  그는 한나라 말 초성(草聖)인 장지(張芝)와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여 ‘종장(鍾張)’이라 불렸다.  세상에 전해지는 그의 작품으로는 <선시표(宣示表)>, <천관내후계직표(薦關內侯季直表)>, <묘전병사첩(墓田丙舍帖)> 등이 있는데, 이에 대한 진위는 이미 증명할 수 없다.

역대로 종요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았다.  뒤에 그는 ‘정서지조(正書之祖)’라 불리며, 장지, 왕희지, 왕헌지 등과 더불어 사현(四賢)이라 일컬었다.  왕승건(王僧虔)은 《논서(論書)》에서 “종요의 글씨는 모든 묘함을 다했다고 말한다.  종요에게는 세 가지 서체가 있었으니 첫째는 명석서로 가장 묘한 것이요, 둘째는 장정서로 세상을 위해 비밀을 전하는 글씨로 소학을 가르친 것이요, 셋째는 행압서로 행서이다.  이 세 가지 법은 모두 세상 사람이 좋아한 것이다(鍾公之書謂之盡妙. 鍾有三體, 一曰銘石書, 最妙者也. 二曰章程書, 爲世傳秘書, 敎小學者也. 三曰行押書, 行書是也. 三法皆世人所善).”라고 했다.  그러나 명석서는 일찍이 이미 존재하지 않고, 세상에 전해지는 몇 작품의 표(表)는 모두 장정서[正書]에 속한다.  이에 대한 장회관의 평가가 가장 높았으니, 그는 《서단》에서 “종요의 해서는 세상에 뛰어났으며, 강하고 부드러움을 겸비했고, 점과 획 사이에 기이한 정취가 많았다.  그윽하고 깊음이 끝이 없고, 고아함이 남음이 있어 진, 한 이래 오직 한 사람일 뿐이라 하겠다(元常眞書絶世, 剛柔備焉, 點畵之間, 多有異趣. 可謂幽深無際, 古雅有餘, 秦漢以來, 一人而已).”라고 칭찬했다.

<천계직표(薦季直表)>는 종요가 쓴 것이라 전해진다.  말행에 ‘黃初二年八月司徒東武侯臣鍾繇表’란 서명이 있고, 소해(小楷)로 씌어졌으며 모두 19행이다.  이 진적은 일찍이 설소팽(薛紹彭)이 소장했다가 뒤에 청나라 내부에 들어갔는데, 청나라 말에 흙 속으로 묻혀 훼손됐다.  이 표 가운데 3개의 ‘民’자가 결필(缺筆)됐는데, 이는 당나라 휘(諱)이니 이것으로 당나라 사람의 임본임을 알 수 있다.  장축(張丑)은 《청하서화방(淸河書畵舫)》에서 “이 첩의 종이와 먹은 기이하고 옛스러우며, 필법은 깊고 침착하다.”라고 했다.  왕주(王澍)는 《죽운제발(竹雲題跋)》에서 이를 높게 평가하며 “종요의 이 첩은 그윽하고 깊은 변화가 뛰어나다.  첩의 뒷부분은 더욱 정미하고 더욱 담백하고 옛스러우니, 대저 만년에 쇄탈하여 모든 찌꺼기를 버려 맑고 허하면서 참된 맛만 남긴 것 같다.”라고 했다.  지금 이 글씨를 보면 필획이 질박하고 풍요로우며, 필치는 짧으나 필의는 길고, 자태가 단정하면서 가로는 가늘고 세로는 굵어 형체와 자태가 풍요롭고 아름다우니 이른바 고비금수(高肥今瘦)라 하겠다.  결체는 너그럽고 넓적하여 횡세를 이루었으니 이는 예서가 남긴 운치이다.  점과 획은 돌아보며 묘한 정신을 들였다.  이 첩은 보기에 평담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고고한 묘한 정취와 순후한 고아함이 있으며,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하고 행간이 무밀(茂密)하며 영할한 뜻이 함유되어 있다.  따라서 이 첩은 옛날 해법(楷法)을 연구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한국서학연구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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