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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법탐원/서예감상-곽노봉선생님

[스크랩] 9. 조전비(漢)

by 혜당이민지 2010. 2. 19.

  

9. 曹全碑(漢)


한나라 비에서 서예가 가장 수려하고 전아한 것은 단연 <조전비>가 으뜸이다.

<조전비>의 전체 명칭은 <한합양령조전기공비(漢郃陽令曹全紀功碑)>이고, 또한 <조경완비(曹景完碑)>라고도 하며 동한 중평(中平) 2년(185)에 새겼다.  비의 전면은 행마다 45자씩 20행을 썼다.  뒷면은 5열로 썼는데 1열은 1행, 2열은 26행, 3열은 5행, 4열은 17행, 5열은 4행으로 되어있다.  전액은 없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명나라 만력(萬曆, 1573-1620) 초에 합양(郃陽, 陝西省 合陽縣)의 신리촌(莘里村)에서 출토되었다.  출토 당시 비석은 양호하여 한 글자의 결함도 없었다.  청나라 강희 임자(壬子, 1672) 이후 중간에 단열이 생겼다.  현재 서안의 비림에 있으며 산동성 등현(滕縣)에 번각본이 있다.

이 비는 매우 높은 예술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있다.  이 글 가운데는 조전(曹全)의 생평과 세계(世系)를 기술했으며 또한 한나라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했다.  예를 들면 “소륵국왕 화덕이 아비를 죽이고 자리를 찬탈했다[疏勒國王和德弑父簒位].”라는 것과 “화덕이 손을 뒤로 하여 묶고 죽었다[和德面縛而死].”라는 말은 문헌의 기록과 달라 역사를 교정할 참고로 삼을만하다.  이외에 또한 장각(張角)이 이끄는 농민의 봉기에 대한 기록도 있다.  당시 농민의 봉기는 섬서성까지 파급되어 합양현의 곽(郭)씨가 이에 호응해 드디어 “성의 절을 불태우고 많은 백성들이 떠들썩해 마을이 불안해지자 고을에 가 급함을 알렸다[燔燒城寺, 萬民騷擾, 人里不安, 之郡告急].”라는 국면을 초래했다.  이는 동한 말년 농민의 봉기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참고 가치가 있다. 

이 비를 서예적인 면에서 볼 때 용필의 특징은 역입평출과 원필을 위주로 함이 매우 분명하다.  운필은 형세에 따라 나아가서 크게 걸터앉거나 도약하는 필획이 매우 적어 격하거나 심함이 없다.  필세는 온건하고 얌전하며 밝은 아름다움이 많다.  파책은 때때로 비교적 길게 썼고 자태도 다양했다.  혹은 작은 시내가 잔잔하게 흐르는 것 같고, 혹은 가볍게 누른 뒤에 형세에 따라 뛰어오름에 여유가 있고 유창해 훨훨 날아오르는 자태를 얻었다.  결체는 정밀하고 둥글면서 윤택하며 비록 향배를 병용했으나 향(向)법이 가장 많고 묘하다.  전절의 변화도 매우 풍부하다.  혹은 둥글게 전환한 외탁법과 같으니 ‘景 焉’ 등이 그러하다.  혹은 오른쪽으로 향해 가볍게 누른 뒤에 뒤집어 꺾으니 ‘秉 商’ 등이 그러하다.  혹은 꺾는 곳에 붓을 들어 가운데로 돌아오게 한 뒤에 뒤집어 꺾으니 ‘冑’자의 아래 꺾음과 같다.  혹은 다른 필획을 일으켜 허공에서 오른쪽 위로 향해 둥근 형세로 누른 뒤에 중심을 아래로 돌려 붓을 꺾으니 ‘叔’자가 그러하다.  혹은 꺾는 곳에서 붓을 들어 위로 향한 뒤에 둥근 형세로 눌러 꺾으니 ‘涌 賁’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경중과 완급이 다르고 그 성정도 각기 다르다.  이런 전절법은 한나라 예서에서 비록 대체로 서로 같으나 각자의 용필방식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므로 설령 서로 같은 것이라도 나타나는 정취는 서로 다르다.  이런 것은 같은 구성이라도 형질이 다른 것으로 오늘날 예서의 사전(使轉)과는 큰 차이가 있다.  사실 해법에서의 사전은 예서에서도 찾을 수 있으나 단지 방원과 형세를 따르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서풍으로 보면 이 비는 음유의 미에 속한다.  아리따운 자태가 많고, 체태가 얌전하고, 농염하면서 속되지 않고, 수려하면서 맑고, 중궁은 긴밀히 수렴하고, 정기는 안으로 감추고, 펼침은 학이 나는 것 같고, 우아하고 조요하면서 단정하고 장엄하며, 예스럽고 질박한 가운데 화려함을 얻었고, 맑고 수려하며, 필묵이 정묘하고, 풍요로움이 쌓였고, 정신은 달리고, 초탈하고 표일함이 뛰어나며, 뜻과 기운이 영활하고 화목하여 밝은 아름다움과 청아한 풍격을 열어주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를 연미하다고 하며 깊이 아는 사람은 골력이 험준하다고 한다.  역대로 이 작품은 <예기비>와 더불어 한예의 지극한 보물로 여겼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한국서학연구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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