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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법탐원/서예감상-곽노봉선생님

[스크랩] 4. 태산각석(秦)

by 혜당이민지 2010. 2. 19.
 

 

4. 泰山刻石(秦)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승상인 이사(李斯)의 ‘서동문(書同文)’ 건의를 받아들여 문자개혁을 실행함으로써 소전(小篆)이 탄생되었다.  진나라는 비록 15년 밖에 유지되지 않았지만 서예사에 있어서는 오히려 소전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태산각석(泰山刻石)>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진시황은 강한 위엄을 보여 해내를 굴복시키려고 일찍이 전국을 5차례 순행했다.  진시황 28년(기원전 219) 동쪽으로 제2차 순행을 하고 태산에 올라 산정(山頂)에 각석을 하여 진나라 공덕을 칭송했다.  그 뒤 10년 후 2세 황제 또한 태산에 올라 그 문장을 다시 새겼으니 이것이 바로 <태산각석>의 유래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의 각석은 모두 승상인 이사가 짓고 썼다고 하나 이를 증명할 길이 없다.  왕창(王昶)은 《금석췌편(金石萃編)》에서 “돌의 높이는 4척 5촌이고, 너비는 1척 4촌이다(石高四尺五寸, 橫一尺四寸).”이라 했다.  <태산각석>은 소전으로 4면에다 새겼는데, 3면은 진시황의 조서(詔書)이고, 1면은 2세의 조서와 따라간 신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모두 22행이며 행마다 12자씩 새겼다.  이 돌이 언제 훼손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명나라 말에 출토되었을 때는 겨우 29자만 남아 있었다.  청나라 건륭(乾隆) 5년(1740)에 화재로 훼손되었고, 가경(嘉慶) 20년(1815)에 장인배(蔣因培)가 옥영지(玉女池)에서 잔석 2개를 얻었을 때는 겨우 10자가 남아 있었다.  이 돌은 지금 산동성 태안의 대묘(岱廟)에 있다.  이 돌에 대한 진위는 일치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진시황의 글이 아니라 2세가 보각한 것이라 한다.  송나라 탁본이 전해지는데 글자수는 136자이다.  <태산각석>을 서예적인 측면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1) 용필이 정미(精美)하다.  용필이 평온하게 흐르듯 전환되고, 골육이 고르고, 함축적이면서 아름답고, 기백이 크고, 간결하고 빠르면서 명쾌하다.  이것과 선진시기의 서법을 비교하면 진나라 소전의 행필은 굵고 가늠이 대체로 같고, 가로획은 평평하고 세로획은 곧으며, 전절하는 곳은 매우 유창하고 표일하여 생경한 필치가 없다.  장두호미(藏頭護尾)를 이루어 붓마다 정미하여 조금도 구차함이 없다.  또한 추획사(錐劃沙)와 같이 아름답고 함축적인 가운데 스스로 골력이 풍부한 기가 있다.  가로의 형세는 온건하고, 세로의 형세는 호방하고 표일하며,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명쾌하며 크고 위대하여 장관을 이룬다.  비록 법도가 근엄하나 위엄과 웅장하고 기이한 신채와 신악묘당(山嶽廟堂)의 기상을 잃지 않았다.  굳세고 평온한 골력에 때때로 날아 움직이는 듯한 생기를 나타냈으니, 이는 마치 장회관(張懷瓘)이 《서단(書斷)》에서 “획이 쇠와 돌 같고, 글자가 날아 움직이는 것 같고(劃如鐵石, 字若飛動)”, “그 형세가 날아오르고, 그 형태가 바르고 의젓하며(其勢飛騰, 其形端儼)”, “법이 되는 글씨의 종주로 삼아도 바뀌지 않는 법이 된다(作楷書之祖, 爲不易之法).”라고 말한 것과 같다.

(2) 결체가 정제되고 획일적이다.  결체는 힘써 평정함과 대칭을 구하고, 가로는 조밀하고 세로는 성글며, 단정하고 웅장한 가운데 은근하게 수려한 기가 있다.  서체로 볼 때 이전의 갑골문, 금문, <석고문>에 비교하여 더욱 간결하고 규범화되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아직 상형문자의 특징들이 남아 있어 원필과 곡선의 아름다움이 특히 뛰어났다.  둘째, 한자 특유의 아름다움을 발휘하고 장식미의 의미를 갖추었다.  선조는 바르고 깨끗하며 협조적이어서 이전의 복잡하고 교차된 형식을 개변했고, 서사의 형식은 규범화로 향했다.  셋째, 힘써 엄격한 평정과 대칭을 구하고, 공정하고 정갈하며, 대소가 서로 비슷하면서도 면목이 충분히 드러났다.  넷째, 가로가 조밀하고 세로가 성글어 전서 형체의 특징을 충분히 표현했고, 웅장하고 위대한 가운데 수려한 기와 아름답고 표일한 맛을 나타냈다.  다섯째, 분포가 엄격하고, 공간의 층차가 서로 대응하는 관계로 엄격한 규칙, 아름다움, 장엄함을 보여주었다.  전서는 이에 이르러 천진하고 고졸하여 뜻과 성정에 따르는 풍운(風韻)이 없어졌다.  이는 완전한 성숙을 의미함과 동시에 이로부터 쇠퇴의 길로 향한다는 것을 뜻한다.  근엄함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죽고 이에 대한 반동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한국서학연구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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