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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025 궁리하지 말고 측량하라

by 혜당이민지 2008. 9. 1.

고전의 향기025         (2008. 9. 1. 월)

궁리하지 말고 측량하라  

하늘은 만물의 할아버지이고, 태양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대지는 만물의 어머니이고, 별과 달은 만물의 삼촌이다. 음양의 기운이 뭉쳐 만물을 낳아주니 그 은혜보다 큰 것은 없고, 숨결을 불어넣고 물로 적셔 만물을 길러주니 그 덕택보다 두터운 것은 없다.

그렇건만 인간은 생명을 마칠 때까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대지를 밟고 살면서도 하늘과 대지가 어떤 형상인지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생명을 마칠 때까지 아버지를 의지하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면서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와 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떻게 그것을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하늘에 대해서는 높고 멀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라 말하고, 대지에 대해서는 두텁고 넓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라 말한다면, 이것은 마치 아버지에 대해서는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라 말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하늘과 대지가 어떤 형상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마음으로 탐구해서는 안 되고, 이치로 탐색해서도 안 된다. 오로지 기기를 만들어서 측정하고, 수학으로 계산하여 추론해야 한다. 측정하는 기기가 다양하지만 네모난 방형과 둥근 원형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추론하는 수학의 방법이 다양하지만 구고(句股)¹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하늘과 대지의 형상을 측정하고 추론하는 차례는 반드시 먼저 방위를 분간하고, 다음에는 척도를 정해야 한다. 방위를 분간함으로써 남극과 북극을 측량하고, 척도를 정함으로써 대지를 측정한다. 먼저 지구를 측량하고 다음에는 모든 천체로 확대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하늘과 대지가 어떤 형상인지 그 대강의 상황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 홍대용_혼천의_18세기_숭실대소장

 - 홍대용(洪大容), 〈측량설(測量說)〉, 《담헌서(湛軒書)》

1) 직각 삼각형을 표시하는 수학 용어로, 직각을 낀 짧은 변이 구(句), 긴 변이 고(股), 빗변을 현(弦)이라 한다. 홍대용은 《주해수용(籌解需用)》에서 각종 구고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48집 《담헌서(湛軒書)》 외집(外集) 6권 주해수용외편(籌解需用外編) [下]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해설


홍대용이 지은 글이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천문학자로서 과학과 수학, 기술에 전문적인 지식을 소유한 학자의 주장답다. 우리가 이 시대 학자들에게서 예상하는 것과는 딴판의 견해를 볼 수 있다. 인간이 생명을 영위하는 공간인 하늘과 대지의 진정한 형상을 몰라서는 안 되고, 알기 위해서는 기기를 만들어 측정하고 수학적 계산을 통해 추론해야 한다는 주장이 핵심이다.

그는 먼저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하늘과 대지의 중요성을 누구나 알고 있으나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하늘과 대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 수준의 지식을 말하지는 않는다. 아버지가 남자요 어머니가 여자라는 것을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그가 지식이라고 한 것은 현재의 의미로 말하자면 자연과학적 지식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각이나 이성에 의지해서는 안 되고, 과학적인 측정을 가능케 하는 기기를 이용하고 수학을 동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상식이나 당시로서는 상식이라고 할 수 없다.

이 글은 짧지만 명료한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지식은 무엇인지, 지식을 획득하는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사고의 변화를 촉구한 진보적 과학자의 단순하면서도 강한 주장이 통쾌하게 전개되고 있다. 옛 글에서 인문적이고 추상적인 글은 많이 만날 수 있지만, 이렇게 엄밀한 과학과 지식의 문제를 명료하게 설파한 글은 쉽게 찾기 어렵다. 그래서 이 글과 생각이 소중한 의미를 갖고 다가온다.

 

   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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