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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020 내 한 몸의 역사

by 혜당이민지 2008. 8. 5.

고전의 향기020        

내 한 몸의 역사

날마다 기록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일이 없는 날이 없어서, 내 한 몸에 모여드는 일이 그치는 때가 없다. 따라서 일은 날마다 다르고 달마다 다르다.

이 일이라는 것은 가까우면 자세하고, 조금 멀어지면 헛갈리고, 아주 멀어지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매일 그것을 기록한다면 가까운 것은 더욱 상세하고, 조금 먼 일은 헛갈리지 않으며, 아주 먼 일이라 해도 잊지 않는다.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일을 기록해 놓으면 따라 행하기에 좋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 해도 기록 덕분에 조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일기란 것은 이 한 몸의 역사다.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랴?

글을 배운 이후로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나는 3,700날 남짓을 거쳐 왔다. 그러나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간 옛일을 돌이켜보면, 꿈속에서는 또렷하던 일이 깨고 나면 흐리멍텅하여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과 같고, 번개가 번쩍번쩍하여 돌아보면 빛이 사라진 것과도 같다. 이것은 날마다 기록하지 않아서 생긴 잘못이다.

수명이란 하늘에 달려있어 늘이고 줄이는 것은 결단코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반면에 일이란 내 몸에 달려 있어 자세하게 쓰느냐 간략하게 쓰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내 하기 나름이다. 따라서 올해부터 날마다 하는 일을 기록하기 시작하려 한다. 그 날 그 날의 일을 날짜에 맞춰 쓰고, 하루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 한 달이 모여 한 해가 될 것이다. 요컨대, 하늘이 정해준 수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거르지 않으려 한다.

삼가 세월의 흐름을 기록하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며, 보고 들은 일을 기술하고, 서사(書史)를 고르게 평할 것이다. 집안일에서부터 조정의 일까지 다루되 삼정승이 임명되고 면직되면 그 사실을 기록하고, 관리의 성적을 매겨서 임용되거나 물러나면 그 사실을 기록하나 그 나머지까지 모두 갖추어 쓰지는 않을 것이니 이 일기는 집안일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하늘이 나타내는 재앙을 살펴서, 번갈아 드는 일식과 월식을 기록하고, 물난리와 가뭄이 들거나 바람 불고 우레가 치면 기록하나 그 나머지까지 모두 기록하지는 않을 것이니 이 일기는 인간의 일을 자세하게 쓰기 때문이다. 일기의 조목과 범례는 이런 정도에 불과하다.

시헌력(時憲曆)¹ 에서 날짜와 간지만 뽑아 새로 큰 책을 하나 만들어 사실을 기록한다. 가까운 일은 자세하게 알고, 오래된 일은 헛갈리지 아니하며, 멀어진 일은 잊지 않기 위해서이니, 뒷날 옛일을 점검하여 열람할 때 대비하고자 한다.

현재와 현격하게 멀리 떨어진 까마득한 상고 시절 가운데 삼황오제(三皇五帝) 시절보다 더 오래된 때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시대의 일에 대해 억지로 끌어다 붙이거나 지나치게 파고들어 그 시대와 관련된 발자취를 갖추어 놓고자 애쓰면서도, 제 한 몸에 이르러서는 절실히 구하는 것이 그만 못하거나 도리어 간혹 소홀히 하여, 일이 일어난 날짜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너무 미혹된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일기의 큰 경개를 서술하여 일기의 앞머리에 둔다. 때는 지금 임금님 51년이다.

◁◀ 흠영(필사본, 부분)

- 유만주(兪晩柱), 〈흠영을미서(欽英乙未敍)〉, 《흠영(欽英)》

1) 1653년 이후 1910년까지 조선에서 쓰인 역법으로 여기서는 시헌력에 따른 달력을 가리킨다.

해설


유만주(兪晩柱, 1755~1788)의 자(字)는 백취(伯翠), 호는 통원(通園)이고,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벼슬하지 않은 채 독서인으로 한 평생을 보내며 저술에 힘썼다. 그의 저술은 24책이나 되는 방대한 일기 《흠영(欽英)》에 고스란히 갈무리되어 있다. 1775년부터 시작하여 1787년까지 1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체계를 잘 갖추어 쓴 일기는 그의 삶과 학문과 문학 등 그가 보고 듣고 경험한 일상의 모든 사실을 세세하게 기록하였다.

이 글은 유만주가 스물 한 살 되던 1775년(영조 51년) 정월 초하루부터 《흠영》을 쓰기 시작하면서 쓴 서문이다. 그는 매 해의 일기마다 첫머리에 모두 서문을 붙였다. 서문의 일부가 없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남아 있어서 일기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서문은 일기를 쓰려는 의도를 밝혔다.

그는 “일기는 이 한 몸의 역사”라고 하며 일기를 써야 하는 이유를 간명하게 밝혔다. 내게 일어나는 일을 나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내게 일어난 일과 내 삶의 소중함은 저 상고적 역사와도, 세상의 큰 사건과도 견줄 필요가 없다. 나에게 날마다 새로 벌어지는 일이 내게는 가장 소중하다. 일기는 그래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상고 시대의 알지도 못하는 사적은 견강부회하여 만들어 내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일어난 일, 그것도 얼마 멀지 않은 시기에 일어난 일조차도 잘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는 일기를 쓰면서 꼼꼼한 시간 단위를 중시하였다. 몇 년 몇 달이라는 큰 시간 단위를 기억과 기록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지난 십여 년의 과거를 3,700일이라는 날짜로 계산하였다. 그는 시간을 잘게 나누어 보고자 하였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시시콜콜하게 시헌력, 곧 당시의 달력에 마련된 공란에 기록하여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세밀하게 기록하고자 하였다. 요즘의 달력에 메모하는 형식과 다르지 않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가물가물해지는, 내게 벌어진 일에 대한 기억을 붙들어 매는 ‘일기’에 관한 새로운 사유를 이 글은 잘 보여준다.

 

   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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