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서재는 내 친구 성중(成仲)의 거처이다. 내도(來道)라는 이름은 ‘도보(道甫)가 찾아오게 하는 방’이라는 뜻으로 붙였다. 여기서 도보는 곧 나로서, 원미(元美) 왕세정(王世貞)의 내옥루(來玉樓)와 사백(思白) 동기창(董其昌)의 내중루(來仲樓)¹에서 의미를 가져다 붙였다.
성중은 이 서재에 기이한 서적과 특이한 문장을 모아 놓았고, 상고 시대의 쇠북과 솥, 오래된 비석을 모아 놓았으며, 이름난 향을 모아 놓았고, 고저(顧渚)에서 나는 우전차(雨前茶)를 모아 두었으며, 단계(端溪) · 흡주의 벼루와 호주(湖州)산 붓, 휘주(徽州)산 먹을 모아 두었다.
나를 위해 늘 맛좋은 술을 마련해 두었다가 흥이 날 때마다 나를 생각했고, 나를 생각할 때마다 바로 말을 보내 나를 불렀다. 그 때마다 나도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문에 들어서 서로를 바라보고 손을 맞잡고서 웃었다. 서로 마주한 채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책상 위에 놓인 책 몇 권을 들어 쓱 읽고 낡은 종이를 펼쳐 주(周) 나라 북에 쓰인 글과 한(漢) 나라 묘갈(墓碣) 두어 개를 어루만지노라면, 성중은 벌써 손수 향을 사르고 있다가, 두건을 젖혀 쓰고 팔뚝을 드러낸 채 앉아서 손수 차를 달여 내게 마시도록 건넸다.
온종일 그렇게 편안하게 지내다가 저물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때에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간 내가 다시 그리워져 바로 나를 부른 일도 있다. 또 어떤 때에는 일이 생겨 열흘이 지나도록 서로 만나지 못해 즐겁지 못한 적도 있었다. 이것이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너무도 좋아한 사연이자 이 서재를 그렇게 이름 붙인 이유이다.
그런데 성중은 재능이 우수하고 운치가 고매하다. 하는 일마다 옛사람을 그리워하되 일의 규모나 발상에서 반드시 양자강 이남의 명사들을 본받고자 하였다. 반면에 나는 질박하고 거칠어서 조선 사람의 거친 습관을 떨쳐내지 못했다.
성중은 서적을 폭넓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고금의 역사적 사실을 매우 잘 알았다. 그의 가슴 속에는 이유산(二酉山)²에 감춰진 책을 모두 읽고 다섯 수레에 실린 서적을 모두 담으려는 욕심을 가졌다. 그렇게 독서한 것이 밖으로 넘쳐흐르고 뿜어 나와 귀한 말과 시문이 만들어졌고, 그 귀한 것들이 남아돌 정도였다. 옛사람의 성씨와 자호(字號), 사는 곳과 계통, 행한 일과 행실을 자세하게 꿰뚫어 알았다. 그러나 나는 스승으로부터 배운 구두를 조심스럽게 삼가 지킬 뿐 여러 학자의 학설을 두루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성중은 옛사람의 글씨와 그림을 비롯한 갖가지 예술에 대하여 그 아름다움과 추함, 진품과 가짜를 마치 구방고³가 말의 관상을 보듯이 분간해 내었기에, 그의 밝은 눈을 터럭만큼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에 나는 글씨 하나를 얻거나 그림 하나를 얻을 때면 몰래 그를 흉내 내어 보았으나 얻는 것이 있을 때는 기뻐하였지만 뜻에 맞지 않을 때는 팽개쳐 버렸다. 그래서 미불(米불)의 글씨가 왕헌지(王獻之)로부터 나오고, 왕유(王維)가 남종화(南宗畵)를 그렸는지 분간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성중은 육경(六經) 외에 불교 전적에도 조예가 깊었다.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여 “삼교(三敎)에는 상이한 가르침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유가와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때때로 대화를 통하여 그의 생각을 비판하였으나 성중의 시원스런 변론을 대적하지는 못했다.
성중은 기갈(飢渴)이 든 것처럼 남의 곤경을 잘 해결해주었고, 남의 궁한 처지를 불쌍히 여겼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대체로 성중은 껍데기 같은 일신의 명예를 벗어던지고 우주 사이에 높이 솟아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졸렬한 법을 지키는 썩은 선비에 불과하다. 정밀함과 거침, 빠름과 둔함, 우아함과 저속함이 서로 반대라서 마치 서로 미워하기에 서로를 배척하는 사람들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중은 세상에 다른 벗이 없고 오로지 나 한 사람과 친하다. 나 또한 다른 벗이 없고 아무리 찾아봐도 오로지 성중 하나와만 친하다. 사람이 서로 친해지려면 반드시 기질과 취향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사람에게 향하게 마련이다. 그렇건만 지금은 서로 반대이면서도 유독 친하게 지내다니 참으로 이치에 어긋난다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