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017생색내지 말라

by 혜당이민지 2008. 8. 5.

고전의 향기017        

생색내지 말라

삼가 살펴보니, 서찰 가운데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풀었다고 자긍하는 대목이 있더군요. 감사하는 마음 한량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바로는,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성현의 밝으신 가르침일 뿐, 아녀자를 위해 억지로 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중심을 꿋꿋하게 잡고 있어서 욕망이 방해하기 어려운 경지에 이른다면, 자연스럽게 어떠한 잡된 생각도 사라지리니, 규중 아녀자로부터 보답을 바랄 필요가 있겠는지요?

서너 달 홀로 잠을 잔 것을 가지고 고결한 행동이라고 하면서 덕을 베풀었다고 생색을 내는 것을 보면, 당신은 욕망이 없는 담박한 사람은 분명코 아닐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결백하여, 밖으로는 화려한 치장을 끊고 안으로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는 분이라면, 굳이 서찰을 보내 자신이 행한 일을 자랑한 뒤에야 남들이 그런 사실을 알아주겠습니까? 곁에는 당신을 잘 아는 벗들이 있고, 휘하에는 가족과 종들이 있어서 수많은 눈들이 지켜볼 터이니 공론이 저절로 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억지로 서찰을 보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당신은 아무래도 밖으로 드러나게 인의를 베풀고서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을 급급해하는 병통을 지닌 듯합니다. 소첩이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소첩이야말로 당신에게 잊어서는 안 될 공을 세워놓았으니 이점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마세요. 여러 달 홀로 잤다고 당신은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 끝에 구구절절 자랑하지마는, 예순 살이 곧 닥칠 분에게는 이렇듯이 홀로 지내는 것이 양기를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것이 제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당신은 귀한 직책에 있어서 도성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볼 테니, 여러 달 홀로 지낸 정도만 가지고도 남들은 하기 어려운 일을 했다고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첩이 옛날 어머님 초상을 치를 때, 사방천지에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고, 당신은 만 리 밖 유배지에서 하늘만 찾으며 통곡이나 했지요. 그때 저는 지극 정성으로 예법을 갖춰 장사를 치러서 남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이르기를, 분묘를 만들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친아들이라도 그보다 잘할 수는 없다고 하더이다.

삼년상을 마치고는 또 만 리 길에 올라 온갖 고생을 하며 험난한 유배지로 당신을 찾아간 일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제가 당신에게 베푼 이러한 지극한 정성 정도는 되어야 ‘잊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당신이 여러 달 홀로 잔 일과 제가 한 여러 가지 일을 서로 견주어 보세요,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거운지를.

이제부터 당신은 잡념을 영영 끊고 기운을 보전하여 수명을 늘리기를 바래요. 이것이 제가 밤낮으로 바라는 소망이랍니다. 그런 제 뜻을 너그러이 살펴주세요. 송씨는 아룁니다.

- 〈유문절공부인송씨답문절공서(柳文節公夫人宋氏答文節公書)〉,《미암일기초(眉巖日記草)》권5

※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34집 《미암집(眉巖集)》 권7 日記 庚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해설


이 편지는 16세기의 학자 미암 유희춘(柳希春 : 1513~1577)의 부인 송씨(宋氏)가 남편에게 보낸 것이다. 유희춘의 일기인 《미암일기초(眉巖日記草)》 권5의 부록에 실려 있고, 또 《미암집(眉巖集)》에 수록된 미암연보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연보에서는 선조 4년(경오년, 1571년) 7월 12일 기사에 이 내용이 있어 이 무렵에 쓴 편지로 보았다. 대체로 1570년과 1571년 사이에 쓴 편지로 추정된다.

이 편지를 쓰게 된 사연은 이렇다. 미암이 한양에서 옥당(玉堂)의 고관으로 봉직하면서 서너 달 동안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홀로 지냈다. 그때 전라도 담양의 본가에서는 송씨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미암이 본가로 보내는 편지 속에서 자신이 부인 외에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며 상당한 자랑을 하였다. 본가에 있는 부인에게 갚기 힘들 만큼의 은혜를 베푼 셈이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 와서 벼슬살이하는 관원들이 소실을 들이는 일이 많았던 사실을 생각하면, 미암의 자랑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편지를 받은 송씨 부인은 장문의 편지를 써서 아들인 광문(光雯)에게 필사를 시켜 보냈다. 그러나 미암의 기대와는 달리 송씨 부인은, 오히려 부인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은 고마워하지 않으면서 당연한 것을 가지고 자랑이나 한다고 핀잔하는 취지로 답장을 하였다. 핀잔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은 것은 나를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군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행위이다. 당연한 행위를 해놓고 내게 보답을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둘째, 이런 일을 해놓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의도 자체가 군자답지 못한 것이다. 셋째, 예순이 가까운 사람이라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으므로 자랑할 일이 못된다.

핀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송씨는 미암에게 그 정도 가지고 자기에게 생색을 내는데 왜 자신이 남편에게 덕을 베푼 지난 일에는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느냐고 채근하였다. 채근한 내용은 미암이 종성으로 유배갔을 때 시어머니 초상을 혼자서 훌륭하게 치른 일과 삼년상을 마친 뒤 그 먼 길을 걸어서 남편을 찾아간 두 가지 일이다. 남들의 주목을 받는 상태에서 미암이 독수공방한 것만 해도 가상할지 모르겠으나, 자신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태에서 그런 갸륵한 일을 했다고 주장했다. 미암더러 어느 것이 더 어려운 일인지 한번 비교해보라고 일깨워주었다.

답장을 보면, 미암이 유구무언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송씨는 남편 미암의 이러한 생색내는 이야기에 대고 잡념을 끊으라고 하였다. 미암연보에는 이 편지를 두고 “송부인의 간찰이 문장과 의미가 모두 좋아서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夫人詞意俱好, 不勝歎伏.)”고 평가했다. 연보를 편찬한 사람의 평가일 텐데 아주 적절한 평가로 보인다.

편지를 쓴 송씨의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성중(成仲), 호는 덕봉(德峰)이다. 성품이 명민했고 시와 문장을 잘 썼다. 여러 편의 문장이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 편지는 조선시대 여성의 당당한 삶의 태도와 자기주장을 보여주는 글로 평가할 만하다. 가식이 없이 여성의 생각, 부부간의 솔직한 심경을 표출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또한 한 통의 편지에 불과하지만, 부부 사이에 편지를 매개로 못할 말 없이 하고 살았던 생활이 보이기도 한다.

 

   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등 다수

'고전번역원 > 고전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019 집으로 돌아오라  (0) 2008.08.05
018 가짜 학 소동  (0) 2008.08.05
016 죽은 벗에게 책을 보낸다  (0) 2008.07.03
015 고질병  (0) 2008.06.25
014 새들의 목소리 경연  (0) 2008.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