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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014 새들의 목소리 경연

by 혜당이민지 2008. 6. 19.

고전의 향기014        

새들의 목소리 경연

꾀꼬리와 비둘기 그리고 무수리는 서로들 제 목소리가 좋다고 승부를 다퉜다. 승부가 나지 않자 상의한 끝에 어른을 찾아가 심사를 받기로 합의했다. 모두들 “황새라면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데 꾀꼬리는 제 목소리가 신비하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 터라 그늘 짙은 곳에서 쉬면서 웃기나 했고, 비둘기도 승부에 크게 괘념치 않고서 느릿느릿 걸으면서 흥얼흥얼 노래나 불렀다.

반면에 무수리는 제가 생각해도 저들보다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뱀 한 마리를 부리에 물고서 다른 새들 몰래 먼저 황새를 찾아갔다. 뱀을 먹으라고 건네면서 개인사정을 말하고 청탁을 넣었다. 마침 배가 고팠던 터라 황새는 한 입에 뱀을 꿀꺽 삼키고서 기분이 좋아져 말했다.

“그저 그것들과 함께 오기나 해!”

셋이 함께 황새한테 갔다. 먼저 꾀꼬리가 목소리를 굴려 꾀꼴꾀꼴 노래를 불렀다. 황새가 주둥아리를 목으로 집어넣으면서 살짝 음미해보더니 말했다.

“맑기는 맑은데 소리가 구슬픈 데 가깝다!”

그 뒤를 이어서 비둘기가 구구구 소리를 냈다. 황새가 모가지를 땅바닥으로 내리면서 슬며시 웃고 말했다.

“그윽하기는 그윽한데 소리가 음탕함에 가깝다!”

맨 마지막으로 무수리가 모가지를 쭉 빼고서 꽥 소리를 질렀다. 황새가 꽁무니를 쳐들고 빠르게 외쳤다.

“탁하기는 탁하지만 소리가 웅장함에 가깝다!”

고과(考課)하는 법에는 뒷부분의 평가가 우수한 사람이 이긴다. 그리하여 무수리는 제가 이겼다고 생각하고 높은 데로 올라가 사방을 휘둘러보면서 부리를 떨며 쉼없이 소리를 질렀다. 황새도 뒤꿈치를 높이 쳐들고 먼 곳을 바라보며 우쭐댔다. 꾀꼬리와 비둘기는 부끄럽기도 하고 기가 꺾이기도 하여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 성대중(成大中), 〈성언(醒言)〉, 《청성잡기(靑城雜記)》

※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구 민족문화추진회)에서 2006년에 간행한 《국역 청성잡기》 p126 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추후 원문이 입력되는 대로 본원 홈페이지 게시판에 수록할 예정입니다.

해설


조선 후기 서얼 출신으로 교서관 교리를 지낸 성대중(成大中, 1732 ~ 1809)이 편찬한 《청성잡기(靑城雜記)》 〈성언(醒言)〉에 실려 있는 우언(寓言)이다. 꾀꼬리와 비둘기 그리고 무수리, 이렇게 세 종류의 새가 목소리를 경쟁하여 무수리가 이겼다는 소재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흥미를 끄는 것은 무엇보다 불 보듯 뻔한 경쟁이 뇌물에 따라 전혀 엉뚱하게 전개된다는 데 있다. 이들 목소리의 우열은 굳이 따질 것이 못된다. 너무도 현격한 차이를 보이도록 꾀꼬리가 월등하게 낫고, 다음에는 비둘기며, 무수리는 비교의 대상에도 끼이지 못할 정도로 나쁘다. 인간의 귀에는 그렇게 들린다.

그런데 뇌물의 힘은 그러한 상식적 평가조차 무너뜨린다. 배고픈 황새에게 뱀을 물어다 준 결과 꾀꼬리의 구슬이 구르는 듯한 높고 고운 목소리는 구슬픈 소리로 전락하고, 비둘기의 낮은 소리는 음탕한 소리로 전락하는 반면, 무수리의 탁한 외마디 소리는 웅장한 소리로 탈바꿈한다.

새들에게 일어난 이 우언은, 누구나 짐작하듯이 바로 인간사회의 문제로 읽게 된다. 인간사 곳곳에 이런 평가행위는 언제나 일어난다. 모든 시험제도가 공정한 평가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실상은 그렇게 공정하지 못하다.

18세기의 문란했던 과거제도와 관리의 고과제도가 이러한 우언을 창작하게 된 뒷배경이 되었으리라. 이 기사에는 “인물을 판단하는 감식안이 없는 시험관이 이 글을 읽었다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지 않을 수 있으랴?”라는 미평(眉評)이 달려 있으니 이 평을 한 사람은 동시대의 문제를 잘 풍자한 우언으로 읽은 셈이다.  


   과거장 풍경_18세기_작자미상  ▶▷

이 우언은 문학적으로도 아주 빼어나다. 각각의 새의 행동과 성격이 아주 잘 묘사되었다. 새의 특징뿐만 아니라 그것이 보여주는 인간 사회의 세부적 행동특징까지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음미할 만한 좋은 작품이다.  

 

   필자 : 안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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