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귀양살이 김정희는 조선 말기의
고증학자이자 금석학자이며,
또한 서도가로서 그의 위치를 굳힌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그의 총명함을 인정한 실학자의 거두 박제가에게서 수업하였으며,
순조 14년(1814)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그는 10년 전의 ‘윤상도의 옥(獄)’에 연루되어
헌종 6년(1840)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어 헌종 말년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 후 1851년에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만에 풀려 돌아왔다.
작화동기
〈세한도〉는 추사가
‘윤상도의 옥’에 관련되어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인
1844년에 그린 그림이다.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한 처지에 있는 자기에게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두 번씩이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 준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에게 답례로 그려 준 것이다.
그림 내용
〈세한도〉는 스산한 겨울 분위기 속에 서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 몇 그루를
갈필을 사용하여 그렸는데, 여백에 예서로 된
〈歲寒圖〉라는 그림 제목이 쓰여 있다.
작은 글씨로 쓴 ‘우선시상(藕船是賞, 藕船은 이상적의 호)’이라는
관지가 이 그림이 이상적을 위해 그려진 것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림 끝에는 〈세한도〉를 그리게 된 연유를 담은 발문(跋文)이 붙어 있고,
그 뒤를 이어 이듬해 이 그림을 가지고 북경에 가서
그곳의 명사 16명에게 보이고 받은 찬시들이 길게 곁들여 있다.
그리고 뒷날 이 그림을 본 추사의 문하생
김석준의 찬(贊)과 오세창·정인보·이시영 등의 시문(詩文) 등이 실려 있다.
찬문 내용 지금까지는 김정희의 자제(自題)만 일반에게 공개되었을 뿐
그 이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는데,
최근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두루말이 내용 전체를 공개 전시함으로써
16명의 중국인이 쓴 찬의 내용과 오세창·정인보·이시영을 비롯한
당대 인사들의 시문(詩文)의 내용이 밝혀졌다.
두루말이 끝부분에 있는 오세창과 정인보의 발문에
세한도에 얽힌 이야기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종합해서 정리해 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완당 김선생이 무고를 당하여 제주도로 귀양갔을 때,
세한도를 그려 그의 뛰어난 제자였던 이상적(李尙迪:藕船) 선생에게 보내
경계와 권면으로 삼도록 했다.
마침 이상적이 1844년 10월 동지사 이정응(李晸應)을 수행하여 연경에 갔을 때
〈세한도〉를 가지고 갔다. 1
845년 정월 22일 이상적은 그의 옛 친구인 오찬(吳贊)의 잔치에 초대된 자리에서
주인, 주빈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이 서로 문(文)을 이야기하고 시(詩)를 노래하였다.
이 자리에 이상적이 〈세한도〉를 내보이며 좌객(座客)의 제찬(題贊)을 청하자
여러 사람들이 문과 시를 제(題)하였는데 이때 참여한 사람이 모두 16명이었다.
이상적은 우의가 넘치는 대접에 감격하여 모든 시문을 모아 한 두루말이로 만들었다.
그것이 완성되자 해도 천리의 탐라에 보내 완당의 쓸쓸함을 위로하였다.
작품 분석 이후에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였던 김병선(金秉善: 梅隱)에게 돌아갔고,
그의 아들 김준학(金準學: 小梅)이 글을 쓰고 읊으면서 보관했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빼앗아 점령하고
모든 공사의 귀중한 서적과 보물을 온갖 수단을 다하여 탈취할 때,
〈세한도〉도 당시 경성대학 교수였던 후지쓰카(藤塚)를 따라 동경으로 가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손재형(孫在馨: 素筌)이 훌쩍 일본으로 건너가
거액을 들여 우리 나라의 진귀한 물건 몇 점을 사들일 때,
그 가운데 〈세한도〉가 포함되었다.
그 후 현재의 소장자인 손창근(孫昌根)이 보관하고 있다.
〈세한도〉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갈필로 성글게 그려진 까닭에
표면적으로는 미완성 작품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미완성의 형태는 결코 근본이 되는 취의(趣意)를 잃고 있거나
불완전한 것은 아니다.
화면 형체는 빈틈이 많고 무언가 결락된 부분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빈틈과 결락은 결코 뜻이 빈곤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빈틈과 미완성은 오히려 자기를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고
겸손한 태도로 사양함을 의미한다.
<세한도>는 감상자가 이 그림을 보는 관조 속에서,
그 빈틈과 미완성이 알차지고 또 완성되어 간다는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표면적인 빈틈과 허전함에는 그 속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충만되어 있다.
그래서 〈세한도〉는 묘사된 형체는 간소하지만 의미는 깊게 느껴지는 것이다.
발문 내용과 송백의 의미
〈세한도〉에는 그림을 그릴 당시의 심정을 토로한
장문(長文)의 글이 딸려 있다는 것을 앞에서 말했지만,
그 내용을 보면 추사가 이상적이 지조와 의리를 지킨 데 대한
고마움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거년에 〈만학〉·〈대운〉 두 책을 부쳐 왔고,
금년에는 또 〈우경문편〉을 부쳐 왔는데,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이 아니고,
머나먼 천만리 밖에서 구입한 것이며,
여러 해 걸려서 얻은 것이요, 일시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세상은 물밀듯이 권력만을 따르는데,
이같이 몸과 마음을 쏟아 얻은 것을 권력자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해외의 한 초췌하고 고고(枯槁)한 사람에게 주기를
세상이 권력가에 추세하는 것과 같이 하니,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력으로 합한 자는 권력이 떨어지면 교분이 성글어 진다’고 하였는데,
군(君)도 역시 이 세상 사람으로 초연히 권력에 추세하는
테두리 밖을 떠나서 권력으로 나를 대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세한 연후에야 송백의 후조를 알게 된다.’고 하였으니,
송백은 사철을 통해 시들지 않는 것이라면,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인데,
성인이 특히 세한을 당한 이후를 칭찬하였다.
지금 군이 나에게 대해 앞이라고 더한 것도 없고 뒤라고 덜한 바도 없으니,
세한 이전의 군은 칭찬할 것 없거니와,
세한 이후의 군은 또한 성인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하 생략)” 이 장문의 발문이 추사의 심정을 글로써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면,
〈세한도〉는 그런 심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발문과 그림이 각기 표현의 방법은 달라도
드러내고자 한 뜻은 서로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림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자연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추사의 사상을 표현하는 데 봉사하는 매개체 구실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세한도>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는
발문에서도 말했듯이 지조와 의리이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지조나 의리의 상징형으로 인식되게 된 것은,
그것이 지닌 생태적 속성에 기인한 것이다.
즉, 추운 겨울이 되면 다른 모든 식물들은 낙엽지는데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만은 상록수의 푸름을 잃지 않는 속성이 의인화된 것이다.
문헌에 보이는 최초의 비유는 공자 《논어》 자한(子罕)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감상 및 평가
〈세한도〉는 탐욕과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오직 지조와 의리를 지키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유학자 추사가 그의 제자 이상적이 지킨 사제간의 의리를
추운 겨울의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에게 그려 준 그림이다.
그렇지만 그림에 담긴 뜻으로 본다면
그것은 단순한 답례품이라기 보다 그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잘못된 세태,
즉 지위와 권세가 있을 때면 방문객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관직에서 물러나면 누구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기회주의적인 세태에 대한 비판이자 시위인 것이다.
〈세한도〉가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또 다른 의미는
문인화에서 실경이든 상상이든 간에
자연 대상이란 결국 자아 표현을 위한 매개체이며,
작품이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의 정신세계가
자연의 인격화를 통하여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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