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 (金麟厚) (1510 ~ 1560)
조선 중기의 문신·유학자로 「坡州邑誌』에 기록되어 있다. 자는 厚之, 호는 河西·湛齋, 본관은 蔚山, 금구현 훈도 丸의 손자이며, 참봉 齡의 아들이다.
김인후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다.
8세 때 당시 전라도관찰사 趙元紀와 함께 聯句를 지었고, 조원기가 錢·穀·筆·墨 가운데 갖고 싶은 것을 말하라고 하자 필묵을 갖고 싶다고 하여 그 이름이 알려졌다.
9세 때는 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奇遵이 그 재주를 보고 탄복하여 후일 세자(인종)의 충직한 신하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1519년(중종 14) 金安國에게서「소학」을 배운 후 18세까지 사서오경과 제자백가를 섭렵하는 등 문학에 뛰어났다.
1531년 사마시에 오르고 성균관에 들어가 退溪 李滉 등과 교우하였다. 성균관에서 과거공부를 하고 있을 때 염병에 걸려 생명이 위급하였으나 성균관의 관원으로 있던 柳希春의 도움으로 회생하였다. 뒷날 유희춘이 귀양갈 때 의지할 곳이 없던 그의 어린 아들을 사위로 맞아들여 보답하였다.
1540년 진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선보되었고, 이듬해 4월 호당(독서당)에 들어가 사가독서 하였으며, 홍문관 정자·저작을 역임하였다.
1542년 3월 경연에서 전경으로서 왕과 정사를 논하였고, 1543년 홍문관박사로 재임중 세자시강원설서를 겸하여 세자 보도의 임무를 맡은 후 홍문관부수찬으로 승진하였다.
1543년 세자시강원설서로 재임중 세자가「朱子大全」과 손수 그린 墨竹을 하사하는 등 대접이 응숭하였다. 그밖에도 그해 3월에는「홍문록」을 편찬하는 19명의 문한관에 선발되었고, 7월에는 경연검토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같은 해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으로 외임을 자청하였다가 중종이 승하하자 제술관으로 중앙에 올라왔다. 그러나 전에 보도했던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1545년 겨울에 병을 핑계로 고향인 장성으로 낙향하였다.
1547년(명종 2) 윤 9월 전라도도사로 재임 중 술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그후 1553년 7월에는 성균관전적으로, 그해 8월에는 홍문관교리로, 같은 해 11월과 1554년 9월에는 성균관직강 등의 청요직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48년 순창군으로 이사한 후 관직에는 연연하지 않고 草堂을 세워 訓蒙이란 편액을 걸고 학문 연구와 후학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듬해 『주자대전」의 「大學講義」를 읽고 『大學講義拔」을 지었으며, 1556년 花潭 徐敬德의 「讀周易試』를 읽고 그의 성리학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듬해 주돈신의『太極圖說」과 張橫渠의 「西銘」등의 글을 읽고 자신의 연구를 종합하여 『周易觀象篇」과『西銘四天圖」를 저술하였다. 여기에서 「태극도설』은 덕성의 본령이며 『서명』은 학문의 綱紀라고 평가하였다. 1558년 겨울에는 高峰 奇大升과 함께 『태극도설」에 대하여 강론하였고, 이듬해 一齋 李恒에게 글을 보내어 그의 太極陰陽一物說을 논박하였다. 그 해 겨울에는 기대승과 四端七情論에 대하여 문답하면서 정밀한 논리로 기대승의 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성리학자로서 程朱의 학설을 따르면서 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였다. 따라서 蘇齋 盧守愼과 함께 夙興夜寐寢箴解를 논하면서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즉,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가 섞여서 마음을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기 때문에 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하여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여 이른바 主敬說을 주장하였다. 성리학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 등에도 정통하였고, 시와 시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초학자에게 한시를 가르치기 위하여 칠언고시 중에서 聯句 100개를 뽑아서 한글로 해석을 붙인 책인 「百聯抄解」를 저술하였다.
문하에 鄭澈·卞成溫·奇孝諫·趙希文·吳健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1568년(선조 1)에 간행된 시문집인 「하서집」 16권 8책과 「주역관상편」 . 『서명사천도』 . 『백련초해」 등이 있다. 현종대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가 1796년(정조 20) 의정부의정으로 다시 추증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순창의 魚巖書院, 장성의 筆巖書院, 곡성의 詠歸書院, 남원의 露峰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처음에는 文靖이었다가 1796년 文正으로 개시되었다.
花含春意無分別(화함춘의무분별)
物感人情有淺深(물감인정유천심)
꽃은 봄뜻을 머금었으나 분별함이 없건만
사물을 느끼는 사람의 정은 얕고 깊음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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