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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005 여자의 그림자

by 혜당이민지 2008. 4. 22.

고전의 향기005            

여자의 그림자

부여 백마강 가에 선비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바둑 두기를 즐긴 그 선비에게 늘 노인 한 사람이 나타나 바둑을 함께 두었다. 그런데 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오랜 시일이 흐른 어느 날 노인은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강물에 사는 용이오. 기한을 채우고 나면 창공으로 솟구쳐 올라가게 되어 있지만 여의주 한 알이 미처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하지 못하고 있소. 여기 거울 하나를 그대에게 주겠소. 그대가 나를 위해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부녀자를 비춰봐 주시오. 그 그림자 곁에 오로지 한 남자만이 나타나는 여자는 남편 하나만을 마음에 두고 있는 아낙이오. 그 여자의 털을 얻어다 내게 주시오. 그리 하면 그대에게 복을 주겠소만 그리 하지 못하겠다면 재앙이 있을 것이오.”

다른 도리가 없어 선비는 허락하고 말았다. 거울을 가지고 먼저 온 집안사람을 비춰보았다. 자신의 아내와 딸, 고모와 자매, 형수와 며느리에 이르기까지 그림자 곁에 두세 남자가 나타나지 않는 여자가 없었고, 심지어는 너댓 명이 넘는 여자도 있었다. 선비는 몹시 놀랐으나 그 사실을 마음에 숨긴 채 돌아다니며 묵묵히 여자를 찾아다녔다.

관북 땅에 이르러 밭 사이를 지나다가 한 남자가 밭을 갈고 있고 한 아낙이 점심참을 내오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거울을 가지고 비춰보았더니 그 아낙의 그림자 곁에는 단지 남자 하나만이 나타났다.

선비는 우두커니 서서 반나절을 자리를 뜨지 못했다. 밭을 갈던 농부가 이상하게 여겨 사연을 물었다. 그제서야 선비가 이유를 말해주었고, 농부는 그 아낙에게 말해 털을 뽑아 선비에게 주었다.

선비가 집으로 돌아오자 노인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은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관동 땅에 이런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나도 들은 적이 있소. 이제 이 물건을 얻었으니 다른 것을 찾을 필요가 있겠소? 열흘이 지나기 전에 내가 변신할 테니 그대는 삼가 피하기 바라오!”

◀◁ 부여 백마강

그 날이 되자 강에서 파도가 용솟음치고 우레와 바람이 몰아치더니 비가 쏟아졌다. 용이 나타나 구름을 타고 하늘로 솟구쳤다. 그 일대 육지는 모두가 깊은 연못으로 바뀌었다. 선비가 높은 언덕에 올라가 제 집을 바라보았더니 제 집 역시 연못이 되어 있었는데 그 깊이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한편, 용이 승천하기 전에 선비는 노인에게 거울로 비춰봤을 때 짐작과 다르게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지를 캐물었다. 노인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여자들이 꼭 음란한 행위를 실제로 범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오. 남녀 사이에는 감정의 교감이 자연스럽게 발생하기에, 미모의 상대를 보게 되면 아름답게 여기고, 또한 감정을 느끼게 되어 그 마음이 이 거울에 비춰지게 되지요. 내가 이 거울을 그대에게 준 이유는 처음부터 감정의 교감이 없는 사람을 찾아서 내가 필요한 곳에 쓰고자 한 것일 뿐이오. 세상 사람들의 육안으로야 어떻게 이러한 사람을 분간할 수 있겠소?”

크게 깨달은 선비는 그 뒤 과거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고 높은 벼슬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남녀 사이에 삼가 구별하는 예절을 지키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 황윤석(黃胤錫),《이재난고(이齋亂藁)》

해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황윤석(1729~1791)의 《이재난고》에 실린 삽화다. 열녀로 칭송받던 여자가 은밀하게 남자를 만나다 발각된 사연과 높은 벼슬아치의 안방을 수시로 드나들던 장님이 눈이 멀쩡한 남자임이 들통난 사연들을 장황하게 말하다가 꺼낸 이야기다.

겉으로는 순결해 보이는 여자가 실제로는 음란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당시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채록했을 것이다.

작자는 여자의 속내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거나, 또는 하늘 아래 한 남자만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여자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같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불륜을 저지르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남녀간에 엄격한 구별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는 한 남자에게 끝까지 정절을 지킬 것을 여성에게 요구한 사회적 관습에 뿌리를 둔 남성의 지나친 순결주의가 반영된 결과이리라.

이 이야기에는 거울로 비춰보면 아내에게 외간남자가 있는지를 밝힐 수 있는 요술 거울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 남성들의 심리도 일부 반영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욕망이 필자나 당시 남성들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현대 사회에는 이러한 요술 거울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더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이면서도 현대인의 욕구와 심리를 더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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