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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법탐원/서예인물론

추사 김정희-4점

by 혜당이민지 2008. 4. 2.




계산무진谿山無盡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위의 작품은 추사 김정희의 서예 예술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서 추사 김정희는 재미있는 구도를 꾀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큰 글자 다섯 자는 모두 가로로 긋는 획을 첫째 획으로 시작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는 이를 살려 다섯 자의 첫 획들이 마치 하나의 줄을 이루 듯이 같은 높이로 줄을 맞추어 바짝 붙여 썼다. 그리고 글자의 나머지 부분의 획들은 다양한 서체의 크기가 다른 획들로 맨 위의 가로획에 줄을 매단 듯 썼다. 결국 어떤 평자들이 썼듯이 글씨의 전체적인 모습은 마치 여름날 빨랫줄에 옷들을 걸어 말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 듯 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는 예서의 작품이라고 하겠으나, 필획과 형태 중에는 전서와 행서의 기운을 가진 것들이 적지 않게 섞여 있다. 예서의 글씨는 본래 가로로 퍼진 글씨로 납작하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는 다섯 자 모두를 전서나 해서와 같이 세로로 길게 매달리듯 내려썼다. 먼저 첫번째 글자인 잔殘을 보자. 추사 김정희는 이 자형의 원형을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전서체에서 따오고, 아래로 늘어진 획들은 모두 전서의 곡선을 살린 원필로 처리하였다. 두 번째 글자 서書도 고체에서 그 형태를 따 왔으나 필법은 완전한 예서체로 단지 세로로 길게 형태만을 바꾸어 처리하였다. 세번째 완頑자의 첫 부분인 원元자를 전체 작품의 정 가운데에 위치시키면서 아래 두 획의 향배를 힘차게 등지게 하여 잔뜩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힘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두번째 혈頁자의 첫째 가로획의 끝을 위로 치켜 올려 전체적으로 직선화된 맨 위쪽의 가로획들에 변화를 주었다. 다음의 석石자도 기이한 형태가 되었다. 둘째 삐침의 획을 너무 직선적으로 처리한 김에 내쳐 구口자의 모양을 마치 완전히 막힌 돌 덩어리를 그린 듯 처리하였다. 그는 여기서 이 작품의 문장의 뜻인 풍화된 비석조각의 이미지를 그린 듯 하다. 마지막 자에서는 녀女자를 예외적으로 행초로 처리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전형적인 예서의 필치로 처리하였다. 여기서 녀女자를 행초의 둥근 원형으로 크게 처리한 까닭에 옆의 석石자의 뻣뻣하게 삐친 자획을 더욱 강하고 힘차게 느끼게 하였다. 또한 맨 마지막의 글자 처리를 부드럽게 하여 첫번째 잔殘자의 부드러움과 함께 좌우의 양쪽 끝에서 부드러운 것이 안쪽의 서書자와 완석頑石(모진 돌)의 딱딱한 세 글자의 형태와 의미를 부드럽게 감싸도록 하였다.
또한 적당한 비백飛白의 효과가 나타난 점으로 보아 상당히 빠른 운필運筆을 구사하여 일필휘지一筆揮之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운氣韻이 생동하며, 전체적으로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구도, 운필, 필획 모든 점에서 득의得意로 가든 찬 작품이라 하겠다.
위와 같은 나의 작품 해석은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의 제멋대로의 해석일까? 나는 추사 김정희가 이런 치밀한 계산과 작품 구상을 사전에 하고서 이 작품을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오랜 세월 금석학과 서예를 연구하고 글씨를 쓰다 보니 흥이나서 일필휘지하여 작품을 쓸 때에도 부지식간不知不識間에, 즉 자기도 미쳐 느끼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작품을 저절로 쓰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추사 김정희의 예술적 완성과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글씨는 신비하고 오묘하다. 그의 글씨는 현대적이며 추상적이다. 그의 글씨는 그림과 같으며 시적이다. 추사 김정희는 그가 부리고 싶은 멋과 흥취를 모두 이런 글자의 변형과 필획의 특이함과 배치의 요령을 통하여 잔뜩 뽐내고 있다.

 

 

 


 

11년 간의 세월을 귀양지에서 보낸 추사 김정희는 만년을 부친의 묘가 있는 과천의 한 절에 은둔하며 학문과 서예, 불교의 선리禪理에 몰두하다 1986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추사 김정희는 달관한 마음에서 모든 정치적 속박과 세속적 욕망을 벗어 버렸다. 그는 깊은 사변과 성찰로 자아와 인생을 뒤돌아보며 참된 의미를 글로 쓰고 글씨로 썼다.
위의 서예 작품은 생전에 자식이 없던 추사 김정희가 어느 평민의 집에 초대받아 가보고, 화목한 한 가정을 보고 느낀 점을 표현한 글과 글씨로서 전형적인 추사체의 글씨로 유명하다. 필획은 예서의 맛을 풍기나 세로로 긴 글씨의 형태와 결구는 해서에 가깝다. 또한 협서脇書는 추사체 특유의 행서로 썼다. <불이선란도>만큼이나 편안하고 자유자재한 운필로 신분을 알 수 없는 고농古農이란 사람에게 써 준 글씨다.

 
<대팽고회大烹高會, 예서隸書, 지본묵서紙本墨書, 129.5x31.9cm, 1855년 작, 간송미술관 소장>
<도판-133: 추사 김정희-중앙일보사>
 
大烹豆腐瓜畺菜  좋은 반찬은 바로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高會夫妻兒女孫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의 화기애애한 모습이다
 
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  이는 촌사람의 제일 가는 즐어움중의 즐거음
雖腰間斗大黃金印      비록 허리에 말(두斗)만큼 큰 황금도잘을 차고
食前方丈              음식을 사방 10자 되는 상에 차려놓고
待妾數百              수백명 여인이 시중을 들어도
能亨此味者幾人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될까?
爲古農書              고농을 위해 쓰다
七十一果              나이 일흔하나에
 
그는 산해진미山海珍味의 잔치음식보다도 가족 삼대가 둘러앉아 스스로 만든 두부와 제 밭에서 일구어 따온 야채와 나물을 먹으며 즐겁게 사는 모습에서 새삼 삶의 진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백성들의 삶 속에 깃든 대를 이어가는 소박한 삶과 그 속에 숨은 생명의 이어짐에 삶에 진실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 추사 김정희도 마침내 그들과 같은 백성의 삶을 살게 되었다. 더 이상 왕후장상王侯將相의 부귀영화富貴榮華도 덧없음을 깨닫고, 벼슬길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는 오로지 자연과 더불어 살고 불법에 귀의하여 해탈의 경지에 오르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