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간의 세월을 귀양지에서 보낸 추사 김정희는 만년을 부친의 묘가 있는 과천의 한 절에 은둔하며 학문과 서예, 불교의 선리禪理에 몰두하다 1986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추사 김정희는 달관한 마음에서 모든 정치적 속박과 세속적 욕망을 벗어 버렸다. 그는 깊은 사변과 성찰로 자아와 인생을 뒤돌아보며 참된 의미를 글로 쓰고 글씨로 썼다.
위의 서예 작품은 생전에 자식이 없던 추사 김정희가 어느 평민의 집에 초대받아 가보고, 화목한 한 가정을 보고 느낀 점을 표현한 글과 글씨로서 전형적인 추사체의 글씨로 유명하다. 필획은 예서의 맛을 풍기나 세로로 긴 글씨의 형태와 결구는 해서에 가깝다. 또한 협서脇書는 추사체 특유의 행서로 썼다. <불이선란도>만큼이나 편안하고 자유자재한 운필로 신분을 알 수 없는 고농古農이란 사람에게 써 준 글씨다.
<대팽고회大烹高會, 예서隸書, 지본묵서紙本墨書, 129.5x31.9cm, 1855년 작, 간송미술관 소장>
<도판-133: 추사 김정희-중앙일보사>
大烹豆腐瓜畺菜 좋은 반찬은 바로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高會夫妻兒女孫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의 화기애애한 모습이다
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 이는 촌사람의 제일 가는 즐어움중의 즐거음
雖腰間斗大黃金印 비록 허리에 말(두斗)만큼 큰 황금도잘을 차고
食前方丈 음식을 사방 10자 되는 상에 차려놓고
待妾數百 수백명 여인이 시중을 들어도
能亨此味者幾人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될까?
爲古農書 고농을 위해 쓰다
七十一果 나이 일흔하나에
그는 산해진미山海珍味의 잔치음식보다도 가족 삼대가 둘러앉아 스스로 만든 두부와 제 밭에서 일구어 따온 야채와 나물을 먹으며 즐겁게 사는 모습에서 새삼 삶의 진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백성들의 삶 속에 깃든 대를 이어가는 소박한 삶과 그 속에 숨은 생명의 이어짐에 삶에 진실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 추사 김정희도 마침내 그들과 같은 백성의 삶을 살게 되었다. 더 이상 왕후장상王侯將相의 부귀영화富貴榮華도 덧없음을 깨닫고, 벼슬길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는 오로지 자연과 더불어 살고 불법에 귀의하여 해탈의 경지에 오르고자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