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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의 향기

002 나무하는 노인

by 혜당이민지 2008. 3. 25.

나무하는 노인


나무하는 노인의 성은 박(朴)씨요 세당(世堂)은 그의 이름이다.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는 정헌공(貞憲公)과 충숙공(忠肅公)으로 인조임금 시절 다 같이 높은 벼슬을 하셨다.

노인이 태어나 네 살 때 아버지 충숙공께서 세상을 버리셨고, 여덟 살 때 병자호란을 만났다. 고아가 되고 가난하여 배울 기회를 놓쳤다. 10여 세 무렵에야 비로소 둘째 형님으로부터 학업을 배우게 되었으나 그마저도 열심히 하지 못했다. 나이 서른둘 나던 현종 임금 첫해에 과거시험을 통해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임금을 모시는 시종(侍從)의 반열에 끼어 팔구 년을 보냈다.

그 무렵 자신을 되돌아보니, 재주는 짧고 힘은 부쳐서 세상에서 무슨 큰 일을 할 능력도 없었고, 세상은 또 날이 갈수록 기강이 무너져 어떻게 바로잡을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관직을 벗어던지고 조정을 떠나 동대문 밖에 물러났다.

한양 성곽으로부터 삼십 리 떨어진 수락산 서쪽 골짜기에 터를 잡아 살면서 골짜기 이름을 석천동(石泉洞)이라 하였다. 그곳에 머물면서 자신의 호를 서쪽 개울에서 나무하는 늙은이라는 뜻으로 서계초수(西溪樵수[嫂-女])라 지었다.

계곡물에 바짝 붙여 집을 짓고 울타리는 따로 만들지 않았다. 복숭아와 살구, 배와 밤을 심어서 집을 에워쌌다. 오이를 심고 벼를 수확하는 논을 만들었으며, 나무를 해 팔아서 생계를 꾸려갔다. 농사짓는 철이 닥치면 논밭 사이에서 몸을 놀리지 않은 때가 없어 호미 쥐고 쟁기 멘 농부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처음에는 가끔씩 조정에서 내려오는 명을 받들기도 했다. 하지만 뒤에는 몇 번을 불러도 가지를 않았다. 삼십여 년을 그렇게 지내다 인생을 마쳤다. 나이는 칠십 세를 넘겼다. 그가 살던 집 뒤편 백 수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장사를 지냈다.

그는 일찍이 <통설(通說)>을 지어 시경과 서경, 그리고 사서(四書)의 뜻을 밝혔다. 또 노자와 장자 두 종의 책에 주석을 달아 그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냈다. 특히, 맹자(孟子) 말씀을 몹시 좋아하였다.

차라리 외롭고 쓸쓸하게 남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살아갈지언정, 이런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런 세상을 위해 일하고 좋게좋게 지내면 되지 않느냐는 것들에게는 머리를 수그린 채 뒤따르는 짓거리는 결단코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의 의지가 그랬다.

(서계초수묘표(西溪樵수墓表), 《서계집(西溪集)》)

해설

17세기의 선비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이 자신의 삶을 간명하게 정리한 글이다. 서쪽 개울에서 나무하는 늙은이라는 뜻의 서계초수(西溪樵수)는 박세당의 호이고, 묘표(墓表)는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에 쓴 글이다.

묘표는 보통 사후에 타인이 써주는 글인데 박세당은 죽은 뒤에 세울 묘표에 자신이 미리 글을 써놓았다. 자신의 나이가 벌써 70세를 넘겼다고 밝혔으므로 죽기 한두 해 전에 썼을 것이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계열의 글로써 넓게 보아 자서전의 일종이다.

박세당은 사상사와 정치사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사변록(思辨錄)》을 지은 유학자이다. 남의 의견에 섣불리 찬동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기 길을 걸어간 고집스런 학자로 널리 알려졌다. 노론과 정치적으로 대결하여 후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기도 하였다.

이 글에도 나오는 조부 정헌공 박동선(朴東善)과 아버지 충숙공 박정(朴炡)은 모두 강직하면서도 높은 벼슬을 했던 분이다. 특히 박정은 인조반정에 참여하고 공신이 되었다.

그런 명문가 자제로서 박세당은 문과에 급제하여 젊은 시절 장래가 촉망되는 관료였음에도 불구하고 뜻이 맞지 않자 과감하게 조정을 등지고 다시는 조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는 수락산 계곡에 집을 짓고 야인으로 살면서 농부들과 어울리며 학문을 연마하다 일생을 마쳤다. 지금도 수락산 자락에는 곳곳에 그의 자취가 남아있다.

이 글은 그런 자신의 삶과 의중을 간결하면서도 힘차게 묘사하였다. 뻣뻣한 사대부의 마음과 행동의 자취가 행간에 넘친다. 맹자(孟子)가 말한 내용을 추려서 자신의 심사를 드러낸 마지막 대목은 서슬이 퍼렇다. 지나치리만큼 확고한 신념과 의지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필자 : 안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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