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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고전칼럼

* 기물명(器物銘) : 사물을 벗하는 법

by 혜당이민지 2008. 9. 5.

기물명(器物銘) : 사물을 벗하는 법
필자 : 김동준 
 

1. 성호 이익의 손톱과 이불

성호(星湖) 이익(李瀷: 1629-1690) 선생의 임종 장면에서 반짝거리는 작품이 눈에 띤다. 선생은 중년 이후부터 증자(曾子)가 몸을 온전히 하여 효성을 다한 일을 상기하고(『논어』「태백」), 자신도 손톱과 발톱을 모아두었다. 임종 즈음에 선생은 '조갑명(爪甲銘)', 즉 '손톱과 발톱에 부친 좌우명'을 지어 유언(遺言)으로 삼았다.

(전략) 옛적 나 어렸을 때는, 손·발톱 거둘 줄 몰랐다가, 오직 보존하게 된 일은, 중년부터 시작하였다. 모아 둔 것을 합쳐 보니, 손바닥 가득 두 줌이라. 흘러간 세월을, 이로 헤아려 알겠구나. 각각을 봉투에 싸서, 후손에게 맡겨 부탁하노니, 남긴 머리카락은 베개로 대신하고, 오른쪽에 이것을 채워두거라. (후략) 〔昔我年少 未解藏置 惟其藏置 自中歲始 合以觀之 滿握者二 年數支離 較斯可췌_1) 各成封識 留付後嗣 遺髮代枕 右旁塡此〕

손톱을 유언의 소재로 삼는 일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운 풍속이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의 중세적 도덕에 따르면 머리카락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그들 시대의 효였다. 선생은 중년 이후의 머리카락과 손톱·발톱을 모아 관(棺)에 넣고 선산(先山)에 누운 부모님을 찾아뵌 셈이다. 선생의 염복(斂服)에도 '지피명(紙被銘)'의 사연이 전한다.

종이 이불 만든 일로, 사마광이 명(銘)을 지었네. 몸 덮고 염(斂) 했으니, 사람들이 이를 칭송했네. 박한 물건이나 쓰임은 무거워, 가난한 방에 참으로 맞네. 내 이를 따르니, 후사(後嗣)들도 알기를.〔維紙爲衾 馬公銘詩 周身비_2)斂 人或謂之 物薄用重 貧室협_3)宜 我則遵焉 後嗣攸知〕

만년에 그는 이 작품을 매우 아꼈다. 제자 안정복(安鼎福)과 상례복(喪禮服)을 논한 편지('答安百順 丙子', 76세)에서 전문을 인용해서 애중하는 마음을 보였다.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불머리에 위의 명(銘)을 적고, 죽고 나면 그 허름한 이불을 잘라 심의(深衣)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1) 췌 : 재다. 헤아리다. 재방변(打의 왼쪽 부분)과 山/而(端에서 立을 뺀 부분)이 결합된 글자.
2) 비 : 다스리다, 갖추다. 엄호밑(床에서 木을 뺀 부분) 속에 비수 비(匕)가 들어간 글자.
3) 협 : 상쾌하다, 흡족하다. 심방변(性에서 生을 뺀 부분)과 터진입구(口의 오른쪽이 터진 것) 속에 夾이 들어간 것이 결합된 글자.


2. 기물명(器物銘)이란?

명(銘)은 잠명류(箴銘類) 문체에 속하는 문학 양식이다. 명(銘)은 그 의미가 '새긴다'는 뜻이므로, 쉬 바뀔 수 없는 굳건한 깨달음을 담는다. 그 속성이 순간보다는 영원을, 가변보다는 불변을, 경험보다는 이념을 향한다. 이중 기물명(器物銘)은 '기물에 새기거나 다짐해두려고 했던 명문(銘文)'을 말한다. 문방사우의 우아한 물품으로부터 거울·빗·대야 등의 세면용품, 책상·서가·안석·등잔 등의 방중용품, 지팡이·혁대·우산·신발 등 출타용품, 찻잔·술잔·거문고·시통(詩筒) 등의 기호용품은 물론이요, 담뱃대나 담배통, 부채와 먼지떨이, 아들의 나막신 혹은 며느리가 올리는 과자상자에까지 적용 범위가 사뭇 넓다. 원칙적으로 글귀를 새겨둘 수 있는 딱딱한 물품에는 기물명의 적용이 가능하다.

'새기'는 행위는 '쓰'는 행위와 다르다. 시(詩)는 읊조림과 쓰기를 중심으로 향유된다. 상황과 기분에 따라 그 내용과 형상이 다채롭다. 그러나 명(銘)은 한 번 새기면 지울 수 없음을 전제로 삼는다. 술잔 하나에 수백 편의 시를 쓸 수는 있으나, 술잔에 새기는 깨달음은 하나로 족하다. 동일한 기물(器物)에 두 개의 명(銘)을 남기는 경우란 거의 없다. 산문은 정보와 사연을 길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명(銘)은 말을 길게 하는 양식이 아니다. 짧은 운문형태에 깨달음의 요체를 압축해야 한다. 씹을수록 오래 향기가 나야 하고, 음미할수록 맛이 깊어야 하며, 작자의 인격과 기물의 속성이 심층의 교감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니 사물과의 교감을 짤막하고 압축적인 형태로 형상화한 것이 기물명(器物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 교감은 중후한 깨달음을 기저로 삼으나, 운치와 해학, 흥과 멋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이다.

무엇보다 기물명의 가장 큰 미덕(美德)은 가슴으로 나누는 사물과의 대화라는 사실이다.

 좋은 벗이 많으면 실수를 줄일 수 있는 법, 기물명은 하나하나가 좋은 벗에 다름 아니다.


3. 기물명의 멋과 가치

"나무가 거꾸로 자라나면, 사람이 그걸 바로 잡는다. 사람의 걸음이 비틀거리면, 나무가 그를 버티어준다.〔木倒生 人正之 人行危 木支之〕" 이것은 지팡이에 새긴 '장명(杖銘)'인데, 성호 선생의 조카인 이용휴(李用休: 1708-1782)가 지었다. 열 두 글자 새긴 지팡이를 짚고서 그는 꼿꼿하고 바르게 재야문형(在野文衡)의 길을 걸었다.

"혜산·중령의 물맛은 지역 따라 다르지만, 끓는 소리 뽀글거리는 거품은 고금이 같네.

〔惠山中령_4)有畺土 松風魚眼無今古〕" 이것은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다관명(茶罐銘)'이다. 혜산과 중령은 물 좋기로 유명한 중국 지명이다. 새긴 글이 차 맛에 손색없다.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매국병명(梅菊甁銘)'도 아취가 있다.

"수월자(水月子)에게 묻나니, 왜 향기는 그리지 않았던 게요? 향기는 그 안에 있으니, 자네 곁에서 펼쳐질 것일세.〔問水月子 胡不畵香 香在其中 第陳爾傍〕" 선배인 수월자〔林熙之〕와의 문답으로 매화와 국화의 향기를 명(銘)으로 사로잡았다.

"가죽신 신으면 편안하고, 나막신 신으면 위태롭지. 그래도 편안하면서 방심하기보다는, 위태로우면서 조심하는 게 나으니라.〔着安 着危 與其安而放心也 寧危而自持〕"

 유신환(兪莘煥: 1801-1859)이 어린 아들의 나막신에 새겨준 '치자극명(穉子극銘)'이다. 이 정도면 나막신이 신이 아니라 명품이다.

기물(器物)에는 실용적이든 심미적이든 제각각 용도가 있다. 물질의 풍성을 누리는 오늘날이지만, 아쉽게도 기물명(器物銘)의 영롱함은 사라지고 말았다. 사라진 것에 대한 연민이라고 치부하기 전에, 우리가 그들만큼 정신적인 성숙을 살고 있는지 먼저 물을 일이다. 낱낱의 작품성을 차치하고 기물명(器物銘)이라는 양식 자체가 참으로 음미할 만하다.

4) 령 : 지명. 삼수변(洙에서 朱를 뺀 부분)과 靈이 결합된 글자.
5) 구 : 신발. 尸 아래에 두인변(行의 왼쪽 부분)과 婁가 결합되어 들어간 글자.

******(보충) 1.신; 2.신다. 신을 신다;3.자주. 여러 번;
6) 극 : 나막신. 尸 아래에 두인변(行의 왼쪽 부분)과 支가 결합되어 들어간 글자. 그 아래 '치자극명(穉子극銘)'의 '극'도 같은 글자임.

*******(보충)屐 :1.나막신. 나무나 풀 따위로 만든 사람이 신는 신의 범칭;

김동준(동덕여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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