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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당이민지 프로필/프로필&평론

#서평 #홍경한(미술평론가) - #혜당이민지 #먹빛춤사위 2014 展

by 혜당이민지 2014. 11. 6.

 

동세와 운필, 그 일상의 여적(餘滴)

 

홍경한(미술평론가)

 

1. 서예는 ‘어떤 대상을 어떻게 묘사하느냐’와는 거리가 있는 장르다. 어떤 것을 담고 있는지, 어떻게 드러내는지가 중요할 뿐, 외형의 모사에는 그리 큰 무게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하면 기표를 둘러싼 기의의 문제라고 볼 수 있으며, 선의 태세와 장단, 운필의 지속과 농담, 글과 여백의 비례 등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회화적이라기 보단 추상에 가까운 표현주의적 흔적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휘황한 멋스러움과 장식미에 의존하기 보다는 초아의 정신에 입각한 소박한 맛을 그 뿌리로 한다는 것도 서예의 특징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특징은 작가 이민지의 작업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오랜 시간 스승으로부터의 배움과 자기만의 독자적인 언어를 생성하기 위한 노력, 그 사이사이 침전된 삶의 투영을 위해 나름의 길을 고집했던 철학에서 오늘의 담백한 작업들이 잉태되었고, 자연스러운 순연에 따라 자신의 작업이 동시대 예술로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준다.

 

실제로도 그의 문자추상은 또렷한 실체를 밝히려는 의지에 앞서 일상에서 읽히는 매순간의 느낌들을 사유와 정신이라는 커다란 프레임 내부에 가두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그건 외적으로 심상을 적신 글의 형태와 리듬에서 발현되며, 내적으론 낱낱이 각인된 글의 내용에서 가시화된다. 그리고 이는 어떠한 틀의 구속으로부터의 이탈, 내레이션 전후 맥락의 이해가 이입되어 있음을 지시한다. 그건 바로 삶의 향기이다.

예술은 삶을 기록한다. 세상의 다양한 순간들을 투영하며, 그 흔적을 탐닉한다. 그러고 보면 예술은 ‘찰나’에 담긴 삶의 의미를 담아내는 것. 그것이 아닐까싶다. 그런 점에서 주변 다양한 일화와 감흥을 감성과 감정으로 화선지에 옮겨온 작가 이민지의 작업도 하나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또한 붓 끝에서 즉시적으로 생성되는 글, 그림처럼 만개한 글의 조합이라는 매력적인 조형 아래 피어나고 드러난다.

즉, 이민지는 심연의 유도에 따라 붓 가는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내면에 똬리 튼 본질에 기댄 채 붓과 함께 춤을 추고. 운필의 강약에 맞춰 첫사랑, 자유, 포옹, 부모, 술, 새, 동행, 소통, 그림에 이르는 다양한 여생의 변주를 심어놓는다. 때론 애잔함으로, 때론 기쁨으로 충만한 일상의 여적을 고요함이 숨 쉬는 공간에서 스스로를 담금질한다. 그는 이 순간을 일컬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2. 이민지의 작업에선 그 만의 색깔이 읽힌다. 대단히 혁명적인 것도, 형식파괴적인 방법도, 거대한 의미조차 스스로 부여하지 않지만(어쩌면 그런 웅대하고 장대함 따윈 되레 꺼려하는 듯한) 그렇기에 오히려 소박한 멋스러움이 배어나온다.

흔들림 없는 소신 가득한 삶의 지향성을 읊조린 <아무것도 생각 말라>(2012)라든가, 생의 작은 미동을 주관적 관찰자의 관점에서 적시한 <얼마나 좋은가>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 작업들에선 예술미를 완성하는 작가의 가치관이 마치 푸르디푸른 파래처럼 부유한다. <지금 내 곁에 그대가 있어 감사합니다>(2013)와 <머물지 마라>(2013) 등과 같은 작업도 매한가지다. 동행의 가치와 부단한 내적 상태의 비유, 조형의 모태가 되는 여러 기록들이 이곳에도 자분 녹아 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건 율동적인 글자의 운용과 그와 맞물린 여백의 변주이다. 이 둘은 부담스럽지 않게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보이는 것에 국한되지 않은, 내면의 세계를 펼쳐내기 위한 겹을 벗고 있음을 증거 한다. 왜냐하면 굳이 구도로 담아내지 않아도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기며 체감하는 예술가로써의 여운이 소복이 쌓여 있음을 깨닫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탓이다.

 

작가가 담아내는 내용은 지근한 생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야말로 일상이 시작(詩作)으로 자라고, 때론 표문처럼, 또는 취서도 마냥 소담한 일기가 축적된다. 여기에 한 획, 두어 번 그의 붓질이 지날 때마다 형성되는 글의 움직임은 가락 같은 강약의 흐름 속에서 언로의 길을 튼다. 그렇게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다시 그 이야기가 흡사 하나의 회화처럼 빚어진다. 그것이 비록 거창하진 않으나 창작가의 에너지를 담아 모든 사물과 형상, 주변 일상의 미감과 생활사들이 그의 내면에 들어서고 있음을 목도케 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이민지의 작품이 돋보이는 이유는 글로써 빚어진 그림이라는 풍경과 묵과 지의 형세가 진솔함에도 결코 그 작은 범주에서 유영하지 않고 새로움에 대한 도전의식으로 독특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꾸미려는 의지가 남다르다는 것에 있다. “밤샘 작업을 하며 아침 태양을 맞이할 때 밤새 발가벗겨진 자신의 영혼을 태양 아래 걸어두고 미소 지을 때 가장 행복해하는 사람, 커피를 지독히도 좋아하고 삶은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아는, 지금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그의 작업노트처럼, 어쩌면 너무나 평범하기에 특별할 수 있는, 그러나 그런 일상을 삶의 기운으로 체화해내는 일련의 시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는 데 변별력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민지의 작품들엔 문기 넘치는 필력을 말하기에 앞서 소박한 실생의 향에서 더욱 큰 여울이 일고, 그 향은 바깥의 우리 곁으로까지 다가선다. 물론 한편으론 서구의 크로키를 보듯 동세와 감필의 기운이 알알이 맺히고 유희정신까지 너끈하다.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생활을 읊되, 친화적이고 삶의 단면을 표현하되 딱딱하거나 엄격하다는 인상은 주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그야말로 사의의 여적이 보다 절절하다.

 

3. 의미전달의 수단이라는 글자의 효용성을 떠나 유연하고 동적인 선, 글자 자체의 독특한 양태, 여백의 균형미 등 순수 조형 관점에서의 진행은 그의 작품을 빛나게 한다. 특히 작가노트에서 엿보이는 예술성에 대한 고민(진솔함이 한껏 묻어나는)은 그의 예술의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이번 전시에 출품된 근작들은 수수함을 넘어 친근한 무념을 상상하게 한다. 특히 글이 선이요 의중이고, 여백이 나와 우리요 세상이라면 그 틈에 놓인 공간은 더 없는 이끌림을 유발한다. 인위적이지 않은 언어들, 화지와 화제사이에서 현실 공간과 작업 속 공간을 이어놓는 주석 같은 이 모든 것은 순전히 관람자의 몫으로 내던져지지만 기실 그 공간 속에서 밀려 올라오는 내면의 감동은 동질의 감흥을 정당화 한다. 때문에 여백의 하얀 면을 전면에 살린 그의 작품은 보는 이들에게 시간의 흐름 속으로 빠져들게 할 뿐만 아니라 여백의 빈자리는 우리에게 명상적인 시간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 속에 담긴 스토리가 종착으로 하는 지점은 궁극적으로 ‘나’라는 존재성의 검증에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또한 작가는 이 검증의 과정을 예술이란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 이민지는 예술가의 길에 놓인 번민과의 싸움, 무엇인가 모를 증표 아래 내걸으며 꿈과 사랑과 모든 광채 있는 것들의 열량을 흡수해 버리는 최후의 언어인 예술을 통해 내면의 자신을 비롯한 본질적인 자아, 인간의 고독감을 드러내는 감각을 지정하고 있음이다. 그리고 그 감각은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조옹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화문의 본질을 추구하는 방법, 작가의 눈에 비친 세상의 관물로 관아를 이끄는 개념들이 솎음 없이 녹아 있는 작업들, 존재의 의의를 알아내어 증명하고자 하는 것에 익숙하지는 않더라도 명백하게 밝히기 위해 통섭으로 다가서는 작가. 그는 오늘도 서예가 원래 그러했듯 자기 자신의 인격을 전인적으로 형성해 나가려는 의태를 작품의 모태로 삼는 듯한 태도를 내보이며 작업을 잇고 있다. 딱히 무엇이 되고자하는 것도 아니기에 지금 이 순간에 솔직하고 충실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가고 있다. 삶 속에서, 예술이란 이름으로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