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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한시감상

내 바보 사려

by 혜당이민지 2015.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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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바보 사려

소년들이 길에서 외치고 다니네
“당신께 팔 물건이 있어요.”
무엇을 팔려느냐 물어보니까
괴롭기 짝이 없는 바보를 팔겠다 하네
늙은이가 말하네.
“내가 사련다. 네게 그 값도 바로 치러주마.”
살면서 지혜롭기 바라지 않네
지혜란 원래 시름겹게 하는 것
온갖 걱정 만들어 평정심을 깨뜨리고
온갖 재주 다 부려 계산하는 데 힘을 쓰지
예로부터 지혜롭다 소문난 이들
세상살이 몹시도 궁박했다네
환하게 빛나는 기름 등불은
활활 타올라 스스로 꺼지고
무늬가 아름다운 짐승은
끝내 덫에 걸리고 말지
지혜가 있는 것이 없는 것만 못하니
바보가 된다면야 더더욱 좋고말고
너에게서 바보를 사 오면서
너에게 교활한 꾀를 건네주지
밝게 보지 못한다 해서 눈머는 것도 아니고
분명히 듣지 못한다 해서 귀먹는 것도 아니네
아! 새해 운수가 크게 길하고 이로우리라는 것을
점쳐볼 것도 없이 바로 알겠네

街頭小兒呌
有物與汝賣
借問賣何物
癡獃苦不差
翁言儂欲買
便可償汝債
人生不願智
智慧自愁殺
百慮散冲和
多才費機械
古來智囊人
處世苦迫隘
膏火有光明
煎熬以自敗
鳥獸有文章
罔羅終見罣
有智不如無
得癡彌可快
買取汝癡獃
輸却汝狡獪
去明目不盲
去聰耳不聵
新年大吉利
不用問蓍卦

- 장유(張維, 1587~1638)
『계곡집(谿谷集)』 권4
「바보를 팔다[賣癡獃] 」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중 한 사람인 계곡(谿谷) 장유의 시문집에 실린 오언 고시(五言古詩)이다.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이 편찬한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면, 새해 첫날 만나는 사람을 불러서 그가 대답을 하면 “내 허술함을 사시오[買我虛疏]”라고 했는데, 이를 “바보를 판다[賣癡]”고 하였으며, 이는 재액(災厄)을 면하기 위해 한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즘도 정월 대보름에 ‘내 더위’ 하며 더위를 팔듯, 새해 첫날 나의 어리숙함을 남에게 넘김으로써 어리숙함으로 인해 겪을 액운을 미리 떨어 버리려는 풍속이었던 듯하다.

  중국 송나라 때 시인 범성대(范成大)의 『범석호집(范石湖集)』 「매치애사(賣癡獃詞)」 에 이미 이러한 풍속이 보인다. 이 작품에는 “아이가 말하네. 할아버지가 사신다면 돈 안 받고 팔게요. 백년천년 동안이라도 바보를 외상으로 드릴게요.[兒云翁買不須錢 奉賖癡獃千百年]”라는 구절이 있다.

  계곡은 바보를 파는 아이에게 선뜻 그 바보를 사겠노라고 답한다. 그것도 공짜로 받는 것도 아니고 값까지 치러 주면서 말이다. 값까지 치러 가면서 바보를 사겠다는 이유는 분명하다. 굳이 재주를 부리지 않고 굳이 지혜를 쓰지 않아도 어지간히 보고 들으며 평범하게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데, 재주를 부리고 계산을 하다 보면 스스로 화를 불러들이게 된다고 보아서다. 그리고는 새해에는 꾀를 버리고 바보를 샀으니 운수대통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지혜로운 사람이 고단한 삶을 살고, 귀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 그로 인해 곤경에 처하는 것을 볼 때, 지혜는 액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액을 부르는 것이고 어리숙함은 액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액을 피하게 해 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여겨 무지를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고통을 겪으며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이라는 결론을 내려 버릴 수도 있다. 과연 무엇이 액일까? 모르는 데서 액이 찾아온다 여겨 남에게 바보를 파는 사람처럼 모르는 것을 액으로 여겨야 할까? 아니면 앎으로 인해 힘들어지니 아는 것을 액으로 여겨야 할까? 새해 첫날 누군가 내게 ‘내 바보 사려’를 외칠 때 나는 기꺼이 지갑을 열어야 할까? 아니면 ‘떼기 이놈!’ 해야 할까?

 

글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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