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의 저자인 이규상(李奎象)의 손자 이원순(李源順)은 서예로 유명한 김상숙(金相肅)의 딸과 혼인하여 이형부(李馨溥, 1791~?)를 낳았다. 맏아들인 이형부는 두 집안의 학문적 명성을 이어받았으나 53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난 뒤 이렇다 할 큰 벼슬을 역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집안의 문한(文翰)을 이어받아 《계서고(溪墅稿)》란 흥미로운 내용의 문집을 남겼다.
이 책에는 그가 어린 시절 외가에서 보낸 때의 일을 감회 어리게 추억하는 사연의 글이 실려 있다. 외가에서 외숙으로부터 공부하고 서책을 선물로 받은 사연이 그 줄거리를 이룬다. 글의 배경에는 외할아버지 김상숙(1717∼1792)이 등장하는데 그는 호를 배와(배[土+丕]窩)라고 하는 저명한 서예가이고, 외숙 역시 글씨를 잘 쓴 저명한 문인 김기서(金箕書, 1766~1822)이다. 이형부의 할아버지인 이장재(李長載)는 친구이자 사돈인 김상숙과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서 김상숙의 글씨를 몹시 칭찬한 일이 있다. 이 집안에서 보관한 김상숙의 필첩이 지금도 남아 있다. 글씨는 두 집안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매개물이다.
지은이가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어느 가을날 책을 햇볕에 말리다가 우연히 찾게 된 필사본 《효경》 때문이다. 외가를 떠나 친가로 가는 그에게 외숙께서 글씨 연습하라고 직접 써서 주신 선물이었다. 정성과 사랑을 담아 친필로 써 주신 그 책을 보노라니, 어린 시절의 한 때 외숙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되살아난다.
외가에 있을 때 그는 몹시 외숙을 따랐다. 외숙은 날마다 외할머니를 찾아와 재미있는 이야기로 온 집안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하고, 자기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조카를 놀리면서 글씨를 가르쳐 주고, 조금만 잘해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외가는 글씨를 잘 쓰는 집안이었다. 글씨 쓴 것을 보고서는 명필인 외할아버지의 솜씨가 보인다면서 어린 조카를 격려하였다. 그런 말씀 하나 하나가 추억 속에 남아 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대목은 외숙이 언젠가 책을 읽은 수효를 세는 서산을 직접 만들어 선물한 장면이다. 이 대목의 묘사는 너무도 선연하여 직접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제는 수십 년이 흘러 외숙은 이미 고인이 되셨고, 자신은 머리가 듬성듬성해질 정도로 나이가 들었다. 외숙을 비롯한 집안 어른의 기대를 받던 아이는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들었다. 집안 어딘가에 숨어있듯이 남아있는 옛 책들에는 가끔 이러한 소중하고 애틋한 사연들이 묻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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