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손님들이 모여 세상 살아가는 맛을 두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어떤 분이 그 맛이 쓰다고 말하자 어떤 분은 맵다고 말하고 어떤 분은 덤덤하여 아무런 맛이 없다고 말했다. 그 가운데 맛이 달다고 한 분은 거의 없었다. 세상사는 맛은 하나이지만 그 맛을 보고서 제각기 자기 입맛대로 품평하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사람의 입맛은 하나이지만 세상맛은 다양하여 사람마다 제각기 한 가지 맛만을 느낄까? 그 여부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오이 한 개는 지극히 작은 채소이다. 하지만 그 꼭지를 씹어 먹은 사람은 입맛이 쓰고, 그 배꼽 부분을 먹은 사람은 맛이 달다. 하물며 인간 세상은 크기 때문에 어떤 맛인들 갖추지 않았겠는가? 다만 이 가엾은 백성들의 삶은 한 가지 일 안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사느라, 늙어 죽을 때까지 그 입을 다른 데로 옮기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소고기의 맛이 당연히 서쪽 나라의 약보다 달 것이다.
노자(老子)는 “다섯 가지 맛[五味]은 사람의 입맛을 상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인간 세상은 크기 때문에 갖추어지지 않은 맛이 없다고 할진대, 세상맛을 본 사람 가운데 입맛이 상한 자가 많으리라. 따라서 인간 만사를 아무리 두루 맛보도록 한다 해도 진정한 맛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열병을 앓는 사람에게 미음죽은 맛이 쓰지만 똥물은 맛이 단 것과 같아서 합당한 이유가 없지 않다.
누군가가 세상맛이 쓴 것은 제 자신이 쓴 것이요, 세상맛이 단 것은 제 자신이 단 것이라고 말한다. 풀뿌리를 씹어 먹을 처지만 된다면 고기맛을 달갑게 잊을 수도 있다. 하는 일마다 마음에 들어야 세상사는 맛이 달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또 그렇지 않다. 씀바귀가 쓰지만 오히려 냉이처럼 편안히 즐길 만하다. 그러나 황벽나무 껍질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참을성이 있는 자라도 끝내 맛이 달다고 말하지 못한다. 성인의 큰 도량으로도 '현재 환난(患難)이 닥친 상황이라면 환난 속에서 행해야 할 도리를 행한다'¹고 말했을 뿐이다. 질병을 즐기고 평안함을 싫어하여 일반 사람의 호오(好惡)와는 반대로 산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쓴 맛 매운 맛을 꼭 없앨 것은 아니고, 단 맛을 꼭 얻을 것은 아니다. 쓴 맛 매운 맛, 그리고 단 맛은 제각각 적절한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독한 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칼날에 바른 꿀은 반드시 내 혀를 상하게 하는 법이다. 따라서 단단하다고 뱉고 부드럽다고 삼키는 짓이 자잘한 사람의 행동인 것처럼, 쓰다고 먹고 달다고 사양하는 짓 역시 중도(中道)를 걷는 군자(君子)의 행동은 아니다. |